식탁에서 책을 읽다 말고 전기레인지 옆에 서있는 아이를 향해 조용히 달렸다. 식지 않은 주전자 손잡이를 막 잡으려 하는 아이를 제지했다.
“허니야! 절대 전기레인지 위에 있는 주전자는 만지면 안 돼.” “왜요? 허니도 옥수수차 먹고 싶어요.”
아직 어린데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했지만, 아이를 의자에 앉힌 후 일장연설을 했다. 인터넷에서 화상환자 사진도 보여주고 뜨거운 주전자에 손도 살짝 데보게 해주었다. 한 순간이었지만 가슴이 철렁했다.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로는 나는 뜨거운 차나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몸이 차가워 물도 덥혀 먹는 것이 좋은 체질이지만 만일의 하나 화상 사고의 위험 때문에 물을 끓이는 행위 자체를 최소화하며 살았다. 어제 내린 봄비 때문에 오랜만에 뜨끈한 옥수수차가 먹고 싶다며 남편이 로컬푸드 매장에서 잘 볶아진 옥수수를 구입해 보글보글 끓이고 있었다. 잠시 방심한 사이에 작은 아이가 아빠처럼 그 물을 마셔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가 화상을 입고 치료를 받는다는 것, 상상조차도 끔찍하다.
어릴 적 부모님은 빵 가게를 하셨다. 아빠는 밤낮으로 빵 반죽을 치댔고, 엄마는 부지런히 빵에 들어갈 속 재료를 준비했다. 집안 일과 가게일로 바빴던 엄마는 나를 늘 포대기에 업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열심히 만두에 들어갈 당면을 삶고, 도넛에 넣을 팥을 커다란 솥단지에 넣고 늘러 붙지 않게 젓고 있었다.
잘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사고의 발생은 참말로 순식간이다. 등에 업혀 있던 내가 팥이 팔팔 끓고 있던 솥단지로 풍덩 빠진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일순간이었다.
다행히 응급처치를 잘해 화상을 최소화했지만 아직도 나의 두 정강이에는 그 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일로 일평생 엄마는 나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다. 내 다리의 흉터를 볼 때마다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자주 보았다. 엄마는 그 날 포대기를 더 단단하게 묶지 않은 자신을, 자식 대신 아파 줄 수 없는 자신을 자책하며 힘들어하셨다.
둘째 아이가 조금 더 자랄 때까지 남편과 나는 차를 끓이지 않기로 이야기했다.
나의 어린 시절 화상 사고에 대한 기억뿐만 아니라, 남편도 나처럼 최악의 시나리오가 자주 발생하는 현장에서 일해 왔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비관적인 예측을 하는 편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보면 우리는 비관론자가 맞다.
만일의 하나. 경우의 수로 따지면 만 번 중에 한 번이기에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봐야 할까?
그 만 번 중의 한 번이 나에게 일어난다면, 이 확률게임은 만 분의 일이 아닌 백분의 백이 되어 버린다. 이 확률게임의 변덕이 주는 위력을 알기에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확률이 낮다 하여 나와 무관한 것처럼 무시하고 싶지 않다. 아이들이 어리기에 더욱 낮은 자세로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가능성들에 대해 조심성을 갖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걱정도 팔자라고 했다. 인정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예측해 본다고 해서 그것이 발생한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 많은 걱정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걱정을 보험 삼아서 그런지 걱정한 일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행운의 삶을 살고 있기도 하다.
현재 상태와 미래를 비관해서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고, 최악의 상황에도 대응 가능한지 가늠해 보는 일은 늘 나의 행동방향에 나침반이었다. 상황의 어두운 부분을 먼저 인정했기에 밝은 부분의 소중함을 더 귀하게 여기며 살 수 있었던 것은 걱정이 주는 덤이기도 했다.
밤에 ‘이런 꿈을 꾸어야지’라고 마음먹고 자면 절대 그 꿈을 꾸지 않는 것처럼, 최악의 시나리오를 예측해 보는 일 자체가 그 시나리오의 발생을 현실세계에서 더 멀리 떨어뜨려 놓는 힘을 발휘한다. 신기하고 논리성이 부족해 보이지만 이것 또한 세상의 메커니즘 중에 하나다.
단순히 좋은 일만 일어날 거야 라고 바라는 것은 문제에 대한 대응력을 저하시킨다. 안 좋은 상황을 예비하고, 계획하고 준비하는 성실함이 어느 분야에서든 필요하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해놓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최악이 발생하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무작정 긍정으로 아무것도 예비하지 않은 것은 왠지 게으름이 긍정으로 둔갑한 것 같다.
나는 장밋빛 미래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일의 장점과 최선의 시나리오만 내세우는 사람을 멀리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바로 뱉어 내겠다는 심산으로 들린다. 잘되면 내 탓이고 안되면 너 탓으로 돌릴 사람으로 보인다.
내가 늘 손에 쥐고 있는 걱정 인형 때문에 가끔은 전속력으로 돌진해야 할 때 나아가지 못하는 굼벵이의 속도를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장점보다 단점을 먼저 고려했기에 단점을 극복하는데 집중하느라 장점을 몰라보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걱정의 단점들 때문에 걱정을 외면하려고 시도해 봤지만 나는 그것이 오히려 더 혼란스럽고 힘들었다. 그래서 걱정거리가 생기면 시간을 할애해서 집중적으로 비관만 해보는 구렁텅이의 시간을 갖는다. 그런 집약적인 비관과 고민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다음의 시간은 걱정의 강도가 현격히 줄어들면서 사건의 다른 측면이 시야에 들어오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한쪽 극단의 에너지가 생기면 세상은 으레 반대쪽의 에너지가 균형을 맞추려고 고개를 드는 원리와 같다.
걱정거리가 생기면 괜스레 어설픈 긍정으로 덮어두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걱정에게 일정한 시간을 내어주는 것. 맘껏 걱정해 보았더니 그것은 좀 비현실적이라고 스스로의 인식이 필요한 과정이다.
물론 긍정과 비관 사이에 정답은 없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답은 긍정과 비관의 양단 어딘가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리를 유동적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불완전한 내가 비관 끝 단에 서서 영혼을 상하게 하지 않기를, 심한 긍정의 끝자락에 서서 최악의 시나리오에 무방비 상태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