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12편
여행하는 철학책, 철학하는 여행기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깨끗하고 밝은 곳>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작중에서 나이 많은 웨이터가 신의 이름을 허무로 대체하여 주기도문을 읊는다. “허무에 계신 우리 허무여, 이름이 허무를 받으시오며 나라가 허무하옵시며…”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이 소설을 깊이 이해한다. 삶의 허무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때로 견디기 힘들 만큼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 파도가 들이닥치는 순간처럼 속수무책이 되어버린다. 어딘가에 의존하고 싶다. 무의미한테서 도망치고 싶다. 그러나 도망칠 곳은 없고 무의미는 계속 그 자리에 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처럼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허무 앞에서 무력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린다.
실존주의가 무의미를 탐구한 사상이라고 어디서 들은 적 있다. 내가 실존주의에 관해 제대로 아는 것은 없다.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만 알고 있을 뿐이다. 나는 실존주의를 더 공부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공부해보지 않았다. 내가 게으른 탓도 있지만 실존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코끼리의 다리를 들여다본다고 해서 코끼리를 보았다, 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나는 더 넓은 무언가를 공부해야했다. 실존주의를 둘러싼 배경을 알아야만 할 것 같았다. 즉, 철학의 세계를 조망해야했다. 이것이 내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읽게 된 계기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14장으로 구성되어있다. 각 장마다 한 명의 철학자와 그의 사상을 소개한다. 제목이 주로 이런 식이다. “루소처럼 걷는 법”, “공자처럼 친절을 베푸는 법”, 간디처럼 싸우는 법”. 내가 흥미롭게 읽었던 장을 소개하고 싶다.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 그런데 어디 가서 이 말을 자신 있게 할 수는 없다. 스스로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정말 나는 음악을 사랑하는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어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나는 분명 음악을 사랑하지만 한편으로 음악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모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음악을 오해하고 있다고 확실하게 느낄 뿐이다. 이런 나에게 쇼펜하우어는 음악을 듣는 법을 알려줬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을 사심 없이 들으라고 말한다. 무관심하게 들으라는 게 아니라 음악에게 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판단하지 말고 기대하지 말고 음악을 온전히 음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말에 강력한 울림을 느낀다. 맞다. 나는 음악을 음악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덧붙인다. 음악은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다. 음악은 감정의 본질을 전달한다. 구체적인 슬픔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슬픔 자체를 전달한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무언가에 관해 슬퍼하기 때문이다.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를 느낀다면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슬픔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바로 이거였다. 이게 내가 여태껏 모르고 있던 음악의 핵심이었다. 나는 이제 음악을 똑바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이 최고의 가치라고 했다. 여기서 쾌락은 욕정을 뜻하는 게 아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고통과 불안의 부재라고 정의했다. 만족이 가득한 상태가 아니라 불만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쾌락이라는 것이다. 내가 흥미롭게 읽었던 내용은 에피쿠로스가 쾌락을 분석하는 방식이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분석하여 욕망의 분류체계를 만들었다. 크게 세 가지다. 필요하고 자연스러운 욕망, 필요하지 않지만 자연스러운 욕망, 필요하지도 않고 자연스럽지도 않은 욕망이다. 고된 육체노동을 하고 마시는 물은 첫 번째 욕망이다. 그다음으로 마시는 맥주 한 잔은 두 번째 욕망이다. 마지막으로 마시는 값비싼 샴페인은 세 번째 욕망이다. 나는 세 번째 욕망(필요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은 욕망)으로 스마트폰이 떠올랐다. 물론 스마트폰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필요하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은데도 스마트폰을 만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콘텐츠 추천 알고리즘이나 소설미디어 같은 것은 인생에 필요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은 행위다. 나는 에피쿠로스를 통해 과거를 반성했다.
“주여, 우리에게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가 쓴 기도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스토아 철학의 핵심을 관통하는 문장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이 당연한 말을 실천하지 못해 힘들어한다. 할 수 없는 것을 하려 한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남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 그런데 남의 마음을 바꾸려고 안간힘을 쓴다. 힘만 낭비하고 상처를 받는다.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다. 이 고리를 끊을 수 있도록 스토아학파와 에픽테토스를 자주 생각해야겠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읽고 나서 다시 인생의 무의미를 생각한다. 과연 인생은 의미 있는 것일까? 아니다. 삶에 의미란 없다. 다양한 철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도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 오히려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인생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었다. 이미 철학자들은 허무라는 개념을 알고 있었다. 철학은 확실하게 무의미를 선고했다.
자료를 더 찾아보던 중 니체의 허무주의를 발견했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인정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허무주의를 둘로 나눴다.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 수동적 허무주의는 허무에 사로잡히는 태도다. 허무를 외면하고 도피처를 찾아 달아나려고 한다. 능동적 허무주의는 허무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허무를 극복하려 한다. 허무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찾아 나선다. 이게 내가 추구해야하는 삶의 방향성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허무하다. 그런데 인생이 정말 허무한 것이라면 내가 하고싶은 것을 마음껏 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아무 의미 없다면 자유롭게 내 인생을 살아도 되지 않을까? 파도가 모래성을 부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다시 컵에 모래를 채워 넣는 아이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