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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월 Nov 21. 2020

출산 장면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긴 남편?


MBN의 <나는 자연인이다>의 한 장면이다. 



트라우마 생긴 남편?


출산을 하는 아내를 보고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직접 겪은 아내는 그럼 대체 무엇인가? 이런 형식의 방송이 보여주는 단편적인 장면이 출산한 여성의 목소리를 지운다. 대부분 여성의 출산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남성의 목소리를 대변할 때가 많고 반대로 임신하고 출산한 여성이 어떤 아픔을 겪고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는 잘 보여주지 않는다. 열 달을 임신을 하고, 그리고 출산 후에 온 몸이 망가진다고 하는데, 언론과 사회와 우리 주변에서는 오직 "출산의 경이로움!", "생명의 탄생!" 만을 조명한다. 여성의 '생명'은 뒷전이다.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공감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여성의 문제일 때 자주 나타난다.  


반대로 군인 남자 친구를 둔 여성이 군대 면회를 가서, 부조리한 병영 문화와 교도소 같은 열악한 시설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겼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여성은 그 이후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혼자서 끙끙 앓고 있다면? 그럼 대체로 여성이든 남성이든 여기에 쉽게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군 생활하는 남자 친구가 더 힘들어야지 왜 여자 친구가 트라우마가 생겨?" 


맞다. 실제로 출산했을 때도 여성이 더 힘들지, 왜 남성이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인가?




트라우마가 생긴 간호사


친구 중에 이상하게 간호사가 많다. 간호사 친구는 수술실에서 출산 장면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한다. 그 사건 이후 수술하는 곳을 피하게 돼서 이제는 수술이 필요 없는 병동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이때 이 간호사 친구에게도, 


"야 네가 트라우마가 생겼으면 실제로 출산한 그 여성은 얼마나 힘들었겠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간호사 친구는 여성이다. 이때 바로 위 문장처럼 말할 수 있는가? 뭔가 꺼림칙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그 간호사 친구가 남성이라면? 그때는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문제의 소지가 많다. 남성일 때는 그럴 수 있고 여성일 때는 그래서는 안 된다? 왜냐면 남성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계속 살아왔으니까? 그렇다면 게이 남성이라면? 페미니즘에 종사해서 본업이 여성주의와 연결된 남성이라면? 아니면 여성인데 안티 페미니스트라면? 남성과 여성에 따라 답변이 달라진다면 이런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다. 이는 성별 이분법이라는 렌즈로 문제를 납작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또는 가부장제라는 하나의 악을 설정해서 모든 문제를 선과 악이라는 뚜렷한 경계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하다. 손에 든 게 망치라면 모든 게 다 못으로 보인다.


 


교차성 페미니즘


사실 교차성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굳이 붙이지 않아도 이 문제는 금방 해결할 수 있다. 교차성 페미니즘이란 계급, 인종, 성별, 섹슈얼리티, 이주민, 등등 여러 경계 속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고 연구하는 것을 뜻한다. 


사실 크게 어떤 경계가 교차한다기보다는, 반페미니즘적인 지형과 인간됨 도리의 구분이 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결론


그러니까 저 위에 있는 아저씨는 아내의 출산 경험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상처에 더 집중했다. 이것은 가부장제 사회 또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경험을 지우고, 여성의 발언에 귀 기울이지 않는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 아저씨를 비판한다. "당신의 트라우마가 그것이군요, 하지만 여성의 기억은 어땠나요? 왜 여성의 목소리는 여기에 없나요."라고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신의 트라우마가 그것이군요, "이다. 즉 그 사람의 트라우마는 당연히 인정해야 된다는 것이다. 비록 페미니즘적이지 않은 그의 사상이 작용하지만 말이다. 그 사람이 여성의 목소리를 지웠다고 해서,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만 충실했다고 해서, 개인의 상처를 쉽게 비난하고 헐뜯는 것은 올바른 페미니즘적 해결 방식이 아니다.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되, 개인의 상처를 굳이 조롱할 필요는 없다. 



이게 잘 안 되는 한국 사회


이게 정말 안 되는 것 같다. 상대방이 잘못하면 바로 비판하고 헐뜯기 바쁘다. 그래서 잘잘못을 따질 때, 옳고 그름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약점을 포착하려고 한다. 샘 오취리가 의정부고의 블랙 페이스를 비판할 때, 갑자기 샘 오취리가 이전에 했던 여성 혐오 발언에 주목하면서 그를 조롱했다. 물론 그가 한 여성혐오 발언은 문제가 많다. 그런데 왜 하필 인종차별 비판을 했을 때 사람들은 그 문제를 들고 오는가. 한국 사람들은 의정부고의 블랙 페이스가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BTS를 따라 한다고 노란색으로 얼굴을 칠한 백인은 어떤가?) 이렇게 누군가 잘못을 한 순간, 어떤 경계를 넘어 무작정 상대방을 욕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고 착각한다. 


마찬가지로 저 아저씨가 아내의 경험과 여성의 목소리에 대해 무관심한 부분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또한 이 문제가 저 아저씨의 트라우마를 설명한 발언로부터 시작된 것도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아저씨의 트라우마 자체를 공격하고 그 트라우마를 지우는 것은 올바른 여성주의적 실천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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