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체리 Mar 28. 2021

젊은 꼰대를 견뎌 내면 생기는 일


그는 말이 없었다. 양쪽 볼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막상 퇴사일이 되니까 실감이 잘 나지 않은 듯했다. 모두들 탈의실 안에서 조용히 옷만 갈아입고 있었다. 그래, 이별의 순간은 늘 어색하지.  버석버석 슥슥 패딩점퍼의 겉면이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앞으로 더 좋은 날이 올 거예요."


내가 적막을 깨고 이렇게 말하자 어색함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는 고맙다고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아 힐끗 표정을 보니 눈물이 막 쏟아지려는 걸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문을 닫고 나갔고 그렇게 그날 우리 병원에서 퇴사했다.





신입시절, 그는 나를 가장 괴롭혔던 직원이었다. 고백하자면 그의 태움 때문에 나는 병원 탈의실에서 눈이 빨개지도록 운 적이 있었다. 오십을 바라보는 아줌마가 이십 대 직원에게 괴롭힘을 당해서 엉엉 울 수도 있다는 것은, 취업 전에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나이가 많다고 대접을 받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래도 실제는 생각보다 훨씬 가혹했다.




그 날, 나는 환자들의 초음파를 돕고 있었다.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갑자기 분위기는 싸해져 있었다. 원장에게서 "아니 방금 초음파 끝난 000 환자 초음파 영상 파일 어디 갔어?"라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그날은 내가 초음파 담당이었으므로 당연히 범인은 나였다. 내가 급하게 일을 하느라 초음파 기계에 환자 이름을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아... 망했다.'


신입이었던 나는, 정말 그 파일이 통째로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고 생각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환자를 다시 불러 베드에 눕혀놓고 원장이 덕지덕지 젤을 바르며 초음파를 또 해야만 하는 것인가? 정녕코 그 방법밖에 없는 것인가? 등짝에서 진땀이 흘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때 나는 생신입이었으므로 해결책을 알 길이 없었다. 누군가 나를 도와주길 기대했지만 모두 자기 일에 바빠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침 그가 바로 내 옆자리에 있었다. 급한 불을 어서 꺼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그를 향해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입을 떼려다 그만 '어' 소리도 못 내고 움찔 물러서고 말았다.



그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 분명히 욕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경멸의 눈빛이 뿜어져 나왔고 입꼬리는 묘하게 비틀어져서 실룩거리고 있었다. 내가 도움을 청하려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직 모니터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불행히도 나는 매우 예민한 사람이고 그래서 그의 표정만 보고도 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실수를 한 나에게 만땅으로 짜증이 나 있었고 늙은 신입이 들어와서 일거리가 하나 늘어나는 것에 화가 나 있었다. '당신 하고는 말하기도 귀찮다'. 이것이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날, 결국 나는 내발로 원장실로 들어갔고 화가 난 원장에게 욕을 한 바가지 먹었다. 탈의실에서 서러움의 눈물을  쏟고 나서 밖으로 나가자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어떻게 해결됐냐고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의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그 후에도 묻지 않았다. 다만 똑같은 실수를 안 하려고 정신을 똑바로 차렸을 뿐이다.

 



그 일이 있고 몇 달 후,  나는 우연히 그 일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갓 입사한 신입이 나와 똑같은 실수를 한 것이다. 그는 얼굴이 벌게져서 "이를 어쩌면 좋아요.."라며 내 옷 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래도 선임이랍시고, 나는 해결방법을 찾아주려고 이리저리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럴 수가. 그것은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방사선실에 전화해서 ' 아까 그 파일 찾아서 환자 이름 넣어주세요"라고 말하니 일은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단 1분 만에 말이다. 그 날, 후임은 사람 목숨이라도 살려준 것 마냥 고마워했지만, 나는 그때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허둥대던 내 꼴이 생각나서 오랫동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젊은 꼰대의 뜻. 네이버 국어사전 캡쳐





꼰대를 '정서적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내로남불형 인간'이라고 정의한다면, 단언컨대 꼰대는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자신의 실수에는 관대하면서 남의 실수에는 가혹했던 그도 역시나 꼰대였다. 직장에 안착하기 위해 젊은 꼰대를 견뎌 낼 수밖에 없었던 나는 정말 정신병이 올 것 같았다. 늙은 꼰대는 차라리 다루기 쉬웠다. '거 참 나잇값도 드럽게 못하네'라고 쌍욕을 날리고(속으로) 젊은 내가 하고 말면 그만이다. 그러나 젊은 꼰대에게 당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치욕적이었다. 그것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재취업한 직장에서 젊은 꼰대를 만난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최악의 경험이었다.




경력이 붙어가면서 차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와 부딪치는 일도 적어졌다. 그러나 젊은 꼰대 특유의 날카로움과 예민함(이것은 늙은 꼰대에게는 사실 별로 없다)이 불쑥 튀어나올 때면 한 공간에 있다는 자체가 몹시 불편했다. 환자들과 작은 트러블이라도 있는 날이면 그는 하루 종일 씩씩거리며 물건을 '탁'소리를 내며 내려놓거나 문을 '쾅' 닫는 행동을 하며  자신의 감정을 주변인에게 전이시켰기 때문이다. 나를 직접적으로 태우지 않더라도 그의 부정적 에너지를 견디는 것 자체도 매우 힘들었다.





그는 결국 환자들과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퇴사를 결정했다. 그가 떠나는 날, 이별 인사를 건네었던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나이 먹은 사람은 그 정도는 해야 한다. 그것이 나잇값이다. 그가 나에게 어떤 행동을 했든 간에 그는 퇴사를 한다. 사춘기 아이들처럼 꽁한 마음으로 이별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나를 많이 힘들게 했지만, 아직은 인생의 좋은 면을 더 배워야 할 젊은이였다.



그가 퇴사를 하던 날, 우리는 산뜻하게 이별을 했고, 나는 그의 발개진 눈을 보며 그도 아직은 순수한 한 명의 이십 대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날 나는 그와 있었던 모든 나쁜 기억을 지우기로 했다. 젊은이들의 치기 어린 감정까지 포용하는 것 또한 나잇값이다. 그리고 이 년 동안 그를 잘 겪어내며 직장 생활을 이어나간 나를 칭찬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젊은 꼰대를 견뎌낸 사람은 절대로 꼰대가 될 수 없다



 나와 같은 중년의 재취업자는 아마도 젊은 꼰대를 만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것은 늙은 신입이 맞닥뜨려야 할 필연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들을 나이로 찍어 누르거나 그들과 똑같이 싸우지 않기를 바란다. 젊은 꼰대를 겪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한 편으로는 자신의 나이, 학력, 지식, 경험과 같은 공고한 성을 깨버릴 수 있는 (아프지만 좋은)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젊은 꼰대를 잘 겪어 낸 당신은 절대로 꼰대가 될 수 없다. 당신은 중년 이후의 삶을 더 겸손하고 관대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젊은 꼰대를 견뎌 내면서 모멸감을 견딘 사람에게 주어지는 유일하게 주어지는 상. 그것은 내가 꼰대로 살지 않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가 온다는 말은 꼭 빨래를 걷으라는 말은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