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4
오랜만에 만취 상태로 탁상공론을 했다.
그 자리에서 한 이야기와 맞닿아 있는 예전에 쓴 글이 생각나서.
사랑에 대한 조잡한 신념이 하나 있었다.
한동안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열정적으로 찾아본 적이 있었다. 독립영화라는 이유 때문에 접근성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애써 독립영화관을 찾아가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았었다. 사생활적인 측면은 잠시 미루어두고 영화적인 요소만 들여다봤을 때 여러 걸작이 있겠지만 그중 최고는 단연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이다. 내용도 내용인데 제목에서 주는 울림이 어떤 영화보다 강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교만했었던 내게 가장 필요했던 문장이라 마음을 조금 더 내어줬던 게 아닐까 싶다.
영화의 제목이 이야기해 주듯이 시간은 많은 것을 녹슬게 한다. 도통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남루한 나의 생각도 시간 앞에서는 유통기한이 존재했다. 테이블에 술잔을 내리치며 토해낸 무수한 문장들은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고 있고 그저 "세상살이 다 그런 거지"라는 핑계로 일관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20살이 된 내가 봤던 세상은 속물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촌구석에서 배운 삶의 시선을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입한 탓에 인지부조화가 생겼던 걸까? 다른 건 차치해 두더라도 특히 속물적인 사랑, 속물적인 사람을 보면 천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건이라는 이름으로 입방아에 오르는 모든 것들이 겉으로는 화려해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참 볼품없어 보였다. 간혹 뉴스에서 어느 나이 많은 갑부와 젊은 여자가 결혼한다는 기사라도 보면 "세상 말세다"를 읊조리곤 했었다.
그렇게 쉬이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을 정의하려 들었다. 물론 여기서 그칠 내가 아니었다. 특권의식을 가지는 것도 모자라 두 손에 생각을 꼭 움켜쥐고 이곳저곳 휘두르지 말아야 할 곳에도 짓궂게 휘둘러댔었다. 근시안적인 시력으로 이름 모를 이들을 푹푹 찌르고 다닌 격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야.
그때의 난 어쩌면 속물적인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일찌감치 눈치채고 곱상한 척을 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곱상한 척이라도 해야만 속물적인 것과 견주었을 때 조금이라도 경쟁력이 생기니깐. 그래서 그랬던 것일 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때 묻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이 유치한 우월감을 만들어냈고 "나는 적어도 너희보다는 고결하다"라는 것을 은연중에 이야기하려 했던 건 아닐까? 이렇든 저렇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두고 뭐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청춘이라는 그 두 글자를 앞세워 나의 생각에 끊임없이 정당성을 부여한 꼴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상을 상정해 놓고 그에 부합하지 않다며 욕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사실 내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 계기가 딱히 있는 건 아니다. 나도 꼴에 남자라서 누구를 만나고, 밥벌이를 하고, 늙어가는 부모를 보며,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세상에 떨어져 고군분투를 해보니 인정해야만 하는 것들이 생긴 탓이겠지. 언제나 낭만적일 수만은 없다는 것. 인형극처럼 커튼 뒤에 속물적인 것들이 존재해야만 보는 이들로 하여금 낭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낭만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를 일이겠지.
정답이라 여겼던 것들이 때에 따라 시기에 따라 정답이 아닐 수 있음을 느낀다. 현실이란 측면을 부정하기에는 이제 어리지 않다는 것이 비록 씁쓸할지라도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지.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켜 만들어진 세상일 뿐이다. 곳간에서 인심 나온다라는 말이 있듯이 풍요 속에서 사랑과 행복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럴 확률이 높다. 어른들이 너 죽네 나 죽네 하는 것들 대부분은 그런 것들의 문제라서 상황을 똑똑히 지켜본 너와 나로서는 당연한 결과물을 도출한 것일 수도 있겠지. 되물림을 끊으려는 자세에 돌을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게 본인에게 필요해서든, 다음 세대에게 필요해서든 뭐든 간에 말이다.
그럼에도 주름이 생기는 건 슬프지 않은데 왜 확신에 찼던 나의 눈빛이 흐려지는 건 이리도 슬픈 걸까?
언젠가 닳고 닳아 사라질지언정 나의 생각이 아주 천천히 낡아가기를 욕심부리고 싶어 진다.
미국 래퍼 에미넴이 그런 말을 했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지만 존나 큰 행복은 살 수 있다고. 근데 난 돈으로 존나 큰 행복을 사는 것도 좋지만 누군가의 마음으로 행복을 사고 싶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돈으로 행복을 팔지 않고 내 마음으로 행복을 팔고 싶을 뿐이다. 여태껏 만났던 사람에게 기념일일 때마다 "나는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편지 한 통만 써줬으면 좋겠어"를 말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나이 먹고 구질구질해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너도 나도 아주 작은 것에 마음이 꿈틀거렸으면 좋겠다. 때론 주책바가지가 되더라도 풋풋한 감정이 오랫동안 메마르지 않기를.
생각해 보니 내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주로 롱테이크로 이루어져 있다. 짧게는 10분 길게는 20분의 대화 씬이 빽빽하게 담겨있다. 할리우드에서 볼법한 여느 영화와 달리 화려한 CG도 연출도 존재하지 않는다. 구태어 기교를 부리지 않고 우리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때로는 대화가 지루하고, 어색하고 때로는 편하고, 웃긴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을 쏙 빼닮아 있다. 거기에 더해 찌질함까지 있으니 더할 나위가 없지. 걷어낼 거 다 걷어내고 본래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 그의 표현 방식은 내가 살아왔던 방식과 맞닿아 있어서 저절로 손이 갔던 모양이다. 이러니 평범함에서 특별함을 찾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사랑하지 않으려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