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동쪽여행
논골담길, 비 오는 날 더 빛나는 이유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1일, 묵호 논골담길에 “화첩기행” 방송취재진 요청으로 논골담길을 방문했다. 14년 역사의 ‘논골담길‘은 이날 비와 함께 더욱 특별한 분위기를 보여줬다. 묵호 사람들에게 ‘비‘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묵묵히 살아왔고, 그 흔적이 논골담길 구석구석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취재 일정은 내가 쓴 글을 보고 ‘논골담길 기획자‘ 를 찾았다는 화첩기행 제작을 위해 방문한 방송사의 의미 있는 일정으로 시작됐다. 묵호등대마을 주차장 종점슈퍼에서 방송 취재가 시작됐다. 콘셉은 대화 형식으로 마을의 모습을 담는 일로 시작됐다. 얼떨결에 리포터가 된 느낌으로 첫 질문을 던졌다. 논골담길 탄생의 이야기를 풀어가며 85세의 손만택 어르신과의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어갔다. 묵호에 살게 된 사연과 과거 묵호의 모습, 그리고 논골담길이 생긴 이후 변화한 풍경들을 통해, 묵호가 항구 도시는 물론 사람과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공간임을 느꼈다.
어르신은 과거 묵호를 “사람보다 고기가 많았던 곳”으로 회상했다. 당시 논골은 작은 소나무 밭과 판잣집들이 모인 달동네였고, 위쪽은 덕장이, 아래쪽은 뱃사람들이 주로 살았다. 지금은 벽화와 이야기로 유명해졌지만, 그 뿌리는 분명 생계를 위한 삶의 터전이었다.
반갑게 맞이해 준 종점슈퍼 어르신과 대화를 마치고 난 우리 제작진은 우산을 쓰고 논골 3길과 2길을 걸었다. 나는 옛 묵호 사람들의 삶을 생생히 전해 주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살았던 장화이야기, 어깨에 바지게를 지고 오르내리던 기억, 하교 후 학원은커녕 연탄배달로 보냈던 마을 아이들의 일상, 한때 묵호에 4개나 있던 극장의 모습까지. 이 모든 이야기는 묵호가 ‘예쁜 벽화 골목’이 아닌, 사람과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공간임을 증명했다.
나는 논골담길의 벽화가 예술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묵호라는 지역의 독특함을 담아냈기에 타 지역과 차별화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복제할 수 없는 문화와 이야기, 묵호의 삶과 시간은 그 자체로 논골담길의 경쟁력이다. 또한 마을 주민 모두는 논골담길이 박물관 이상의 가치를 가진 공공예술 공간으로 여행자들에게 잘 소개해달라고 당부했다.
논골담길의 지속성과 가치를 위하여
논골담길은 골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묵호 사람들의 삶과 정서, 그들이 남긴 이야기와 흔적의 집합체다. 이런 공간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벽화를 보완하는 더 깊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벽화의 이미지가 변할 수 있어도, 그 이미지에 담긴 삶의 진정성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
논골담길의 가치는 묵호의 시간과 삶을 품고 있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의 성공은 벽화라는 시각적 요소 덕분이었지만, 앞으로는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지속 가능성이 결정될 것이다. 논골담길이 ‘박물관 이상의 가치’를 가지려면, 묵호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만든 시간의 무게를 대변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논골담길을 걷다 보면, 단순 예쁜 골목이 아닌 묵호의 시간과 사람이 만들어낸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벽화가 지워진다 해도, 그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는 한 논골담길은 계속해서 빛날 것이다. 비 오는 날 묵호처럼, 조용하지만 강렬한 감동을 전하는 곳으로…!
글•사진_ 조연섭 스토리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