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폭력인가요?

아픈 걸 아프다고 말하기까지 걸린 18년

by 나쁜 생존자

죽음의 문턱에서도 나는 18년 간 이어진 폭력을 탓하지 않았다.

모두 괜찮은데 나만 괜찮지 않은 탓.

모두 잊어버렸는데 나만 생생히 기억하는 탓.

모두 행복한데 나만 문제를 찾아버린 탓.

그저 내가 문제였다.


가정폭력 생존자로서 고백하자면 난 스스로를 믿지 않았다.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하던 그때의 나는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다.

알았더라도 스스로를 신뢰하기 어려웠다.

누군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면 난 조금 더 빨리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 스스로 피해자임을 받아들이는 데 1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 글은 나와 비슷한 상황일 당신에게 적는 글이다.


하나 확실한 것은 당신은 괜찮아질 수 있다.

머리카락과 살이 빠지고, 잠도 못 자고, 술이나 담배에 찌들고, 엉망진창인 삶이더라도 말이다.

내가 그랬다. 건강을 회복하고 기억을 떠올려도 괜찮아지기까지 3년이 걸렸다.

트라우마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히지만 스스로를 통찰하면서 나아질 수 있다.




내가 폭력임을 인지하기 어렵도록 가로막은 생각은 주로 세 가지였다.


1.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초등학교 때부터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있었던 일이 부모에겐 없었던 일이 되고, 어제는 괜찮았던 일이 오늘은 괜찮지 않았다.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일까봐 일기를 꾸준히 적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빨간 색연필로 섬뜩한 이야기를 적어놓은 일기를 다시 읽었다. 다행히 부모님은 일기장의 정체를 몰랐지만 내 마음은 배신감으로 휘몰아쳤다. 내 기억이 잘못 된 것이라던 부모의 거짓말. 스스로를 믿을 이유가 생겼지만 증거를 찾을 수 없는 많은 기억에는 여전히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2.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바뀌는 건 없을 거야."

무서웠다. 부모님은 나보다 나이가 더 많으니까. 변호사나 판사, 경찰같은 사람을 더 많이 아니까. 도움을 요청한 걸 들키면 왜 헛소리를 하냐며 혼날 테니까. 이미 사람들은 내가 맞는 걸 알았다. 앞집 주방에서 도마에 칼이 통통거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리는 작고 낡은 빌라에는 26명이 살았고, 그들 중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 난 그게 언제나 야속했다. 가까스로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다들 맞고 사는 거 아니냐는 얘기를 듣거나 내가 오죽 말을 안 들으면 때리겠냐는 답변 뿐이었다. 나이가 어려서 도움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없었기에 인터넷과 무료 법률상담을 유용하게 썼다. 삶에 어른이 없었기에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이 들었다. 사람을 신뢰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보다 나은 대인관계를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쪽으로 고치려고 노력 중이다.

3. "나만 아프고 다들 괜찮은 걸..."

놀랍게도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때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웠다. 폭력을 주로 행한 엄마는 기억을 지워버렸고, 침묵하던 아빠는 어쩔 수 없었다며 회피했고, 같은 피해자였던 언니는 내가 이상하다고 했다. 모두 괜찮은 상황에서 굳이 문제를 짚는 내가 문제였던 것이다. 옛날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내가 나쁜 아이였고, 최근에 일어난 학대도 내가 나쁜 짓을 했기에 생긴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해서 한겨울 새벽에 발가벗겨져 내쫓겼다. 내 나이 22살이었다. 4시간이 지나고 조심히 대문을 열자 엄마는 나가라며 소리질렀다. 동이 틀 무렵 집으로 들어가 잠에 들었다. 아침이 되고 엄마와 아빠는 모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를 대했다. 나 또한 비겁한 마음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을 대했고 안방의 TV소리가 우렁차게 들릴 때 내 방문을 꼭 닫았다.


이 세 가지 생각은 자세히 살펴보면 나의 부모가 심어준 생각이었다.

자신의 학대를 감추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차리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너가 잘못 아는 거야. 난 무서운 사람들을 많이 알아. 다들 괜찮은데 왜 너만 그러니.

이 외에도 "넌 어리고 난 너보다 오래 살았어," "너가 뭘 할 수 있곘어" 등이 있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조언인지, 무엇이 나를 지키는 행위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르시스트 부모가 사용하는 폭력 5가지


1. 경제권 통제

성인이 된다는 건 독립이 가까워진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나르시스트 부모는 자녀가 계속 의존적이길 바라기 때문에 경제권을 통제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도 용돈을 줄 테니 일자리를 구하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얘기를 했다. 그 자체로만 보면 굉장히 좋은 환경이지만, 월 30만원으로 식비, 생활비, 교통비를 해결하면서 돈을 벌지 않기란 어려웠다. 그래서 몰래 일자리를 구했다가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용돈이 회수되었다. 돈을 벌 수 있는 경로를 차단하면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2. 신체적 폭력

내가 기억하는 폭력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시작했다. 이유도 모른 채 의무적으로 아침 6시에 기상해야 하는 것도 그 때 시작했다. 양말을 뒤집어 놓아서, 걸음걸이가 느려서, 책을 읽지 않아서, 아침을 먹지 않아서, 머리를 혼자 못 감아서, 아침에 출근하는 아빠를 제대로 배웅하지 않아서. 맞을 이유는 너무 많았고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다. 때려도 반성하지 않을 때에는 속옷까지 벗겨 집 밖으로 내쫓았다. 고등학생이 되고 뺨을 때리려던 엄마의 팔을 잡고 나서야 폭력이 잦아들었다. 물리적인 제압이 쉬운 어린 아이일 때 주로 신체적 폭력이 행해진다.


3. 정서적 착취

나르시스트 부모는 낮은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아이에게 정서적인 지지를 바랄 때가 많다. 자신의 부모에 대한 욕을 하거나, 자신의 삶이 얼마나 비관적인지 얘기하거나, 본인이 다정하고 사려깊은 걸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며 비판한다. 부모로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아이에게 확인받으려 한다. 아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자신들이 더 잘해줄 수 있는 지 묻는 게 아니라, 그들이 부모로서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말해줘야 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얘기하면 배은망덕한 자녀가 되기 십상이다. 이 외에도 부모 스스로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를 아이에게 투영하면서 낮은 자존감을 물려준다. 똑똑한 자녀인데도 불구하고 멍청하다고 얘기하거나, 이미 말랐는데도 뚱뚱하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자녀의 동의없이 강제적으로 성형수술을 시키는 경우도 보았다. 조건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자신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것 같을 때에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해서 머무르게 한다.


4. 방임

사람들 앞에서는 굉장히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자녀를 걸리적거리는 물건 또는 시녀 정도로 취급한다. 대인기피증이 심해져서 틱과 공황장애가 있을 때에도 학원에 보낼 정도로 내 부모는 학업에 집착했다. 이런 집착적인 상황을 보면 방임으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의식주를 챙기지 않거나, 자녀가 도움을 요청할 때 무시하거나,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모습은 방임에 해당한다. 이런 상반된 행위들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자녀는 혼란을 사랑으로 착각하기 쉽다. 특히 형제나 자매가 있는 경우, 비교대상이 있기 때문에 방임은 더욱 두드러진다. 지저분한 집안 환경 또한 방임에 해당한다. 내가 자라나던 집은 발 디딜 틈 없이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고, 정리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마실 물에 죽은 초파리가 둥둥 떠다녔고, 먹을 게 없어서 냉동실에 얼려둔 코스트코 머핀만 한 달 내내 먹고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다. 아빠는 내 나이를 모를 정도로 관심이 없었고, 엄마는 자신이 입고 맞지 않는 옷을 내게 버렸다. 혼자 씻는 법을 배우기 전에 엄마는 머리를 감겨주다가 갑자기 화를 내며 화장실을 나가기도 했고, 사람이 많은 길가에서 손을 잡고 가다가 한순간에 욕을 하며 뿌리치기도 했다. 내가 대화를 시도할 때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기도 했다. 방임은 여러 종류로 나타나지만, 나르시스트 부모가 집착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분야가 있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5. 가스라이팅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하거나, 기억이 잘못된다는 얘기를 하거나, 학대 증거가 충분한 경우에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다 너를 위한 것이었다며 회피하는 전형적인 나르시스트의 수법 중 하나이다. 특히 가정 내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부모는 이를 이용하기가 쉽다. 결국 자녀는 무엇이 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지면서 스스로를 탓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 모든 폭력은 통제하기 위함이다.


아이가 자신의 길이 아닌 부모가 결정한 길을 걷도록,

스스로 충분히 잘 하는 아이가 부모를 떠나지 않도록,

부모의 낮은 자존감을 계속해서 아이가 채워줄 수 있도록.

자신을 떠나지 않을 평생의 친구인 아이를 통제하는 것이다.


나르시스트 부모에게 자녀란 벗어날 수 없는 족쇄를 채운 노예이다.


발 디딜 곳 없이 어지러운 집, 날파리가 죽어있는 물통, 쉬어버린 밥과 나물, 숨 쉬듯 들리는 부모의 억울함, 맞지도 않는 브라, 똥 묻은 팬티, 내 나이도 모르는 아빠, 구멍난 패딩, 의무적인 아침 6시 기상, 그리고 백점짜리 성적표.


나르시스트 부모에게 중요한 것은 아이가 여섯시에 일어난다는 점과 백점짜리 성적표이다.

그들의 목표는 사회적인 인정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나르시스트 부모는 자녀가 태어날 때부터 그들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 아이를 기른다.

이를 거스르는 행위는 자녀의 존재 이유를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에 처벌받아 마땅한 것이다.

아이는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부모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르시스트 부모는 이를 이용하여 아이가 순종적일 때까지 의식주에서 시작해 마음과 생각까지 통제할 수 있는 모든 분야들에 손을 댄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밖에 새어나가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눈치채기 더욱 어렵다.

결국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것, 또는 누군가가 잘못된 것이라고 다그치기 전까지는 무엇이 폭력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기 쉬운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건 우리가 다시 원상복구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망가고 싶을 때 몸이 얼어붙어서 옴짝달싹 할 수 없던 긴박함을 경험하고 나면 반복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마련이지만, 얼어붙은 마음을 부르르 떨어내면 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대하지 않을 노련함을 배울 수 있다.

지금은 스스로가 깨진 도자기같이 느껴질 수 있더라도 다시 이어붙힐 수 있다.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내면을 돌보고 얘기를 나누면서 이어붙이는 것이다.


무엇이 폭력인지 조금은 안내가 되었다면, 어떻게 나아질 수 있는지 다음 글에서 더 나누도록 하겠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