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라이연 May 09. 2023

장인어른, 이제서야 이해가 갑니다.

결혼 과정도 악몽, 결혼 후에도 고통... 하지만 지금은 행복합니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했던 나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로드사이클을 타고 집 앞 한강으로 나갔다. 남산을 오르고 북악스카이웨이를 오르고 한강 자전거 길을 따라 팔당으로 라이딩을 다녀왔다. 길게는 춘천까지도 내달렸다. 바쁜 회사생활에 지친 내게 자전거는 현실에서 찌든 스트레스를 날려 보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자 내 삶의 가장 큰 활력소였다. 그렇게 자전거를 타다 우연찮게 지금의 아내를 알게 되었고 우리는 연인사이로 발전해 틈만 나면 함께 자전거를 탔다.


나는 처음 MBT(산악자전거)를 타고 주로 산을 올랐다. 그러다 주변 지인들의 권유로 로드사이클을 타게 되었으며, 그렇게 우리는 로드사이클을 타고 주말이면 사방팔당으로 자전거를 타고 놀았다. 그러다 갑자기 미니벨로에 꽂혀 미니벨로 두 대를 구입해 또 함께 신나게 타고 다녔다. 가끔은 차에 싣고 경치 좋은 외곽으로 나가 타기도 했다. 그렇게 모인 자전거가 집에 6대였다. 그렇게 자전거에 빠져 살다 사귄 지 2년이 지났을 즈음 슬슬 결혼얘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아내의 부모님이 사시는 부산으로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수년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부산의 어느 공원에서 어머님, 아내와 함께 셋이 산책하던 중... 난 항상 손잡고 걷는 둘의 뒷모습을 모는 게 참 좋다!



어느 날 부산에서 어머님이 서울로 올라오셨다. 아내가 아버님께 내 얘기를 했더니 아버님이 어머님께 서울에 가서 어떤 녀석인지 한 번 보고 오라고 하신 것이었다. 그렇게 서울에서 어머님을 처음 뵙고 삼청동의 어느 유명 삼계탕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     

식사 자리에서 어머님이 내게 건 낸 말씀은 이랬다. "자네가 부산에 내려가서 ?? 아빠가 무슨 말을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나"라는 것이었다. 아내를 통해 아버님의 성향이나 성격 등등 보통 분이 아니란 것을 미리 들어 짐작은 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독특하시고 또 무서우신 분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식사자리가 끝나고 인사를 드리고 어머님과 헤어졌다. 그래도 어머님의 첫인상은 참 좋았다. 왠지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항상 우리의 편에 서서 우리를 응원해 줄 것 같은 든든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세상 최고의 강적을 만났다

그리고 몇 달 후 아내와 함께 인사를 드리러 부산에 내려갔다. 아파트 앞에 도착하니 심장이 마구 요동치면서 상당히 긴장했었던 당시의 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31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떨리는 마음으로 집 현관 앞에 서니 입 안이 쫙쫙 마르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현관문을 들어서자 어머니가 반겨주셨고 아버님께 인사를 드리는데 아버님의 표정과 반응이 영 못마땅한 표정이셨다.      

거실에 앉아 본격적으로 대화가 시작됐는데 아버님은 나를 심문하듯 질문세례를 퍼부으셨다. 부모님은 뭐 하시냐, 가족관계는, 대학은, 군대는, 회사는 언론노조에 가입이 되어 있느냐 등등... 그러다 나는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듣고야 말았다. 아버님은 "결혼이라는 것은 서로 가족의 수준이 맞아야 결혼생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인데..."라고 말씀하시며 나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셨다. 순간 분노가 치밀었지만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 꾹 참고 또 참았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듣지 말아야 할 내용의 대화가 이어지고 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와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폭풍은 아내에게 고스란히 날아갔다. 아내는 미안함에 계속 나를 다독였지만 화가 풀리지가 않았다. 평생 누구 앞에서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사회생활도 항상 인정받으면서 부족한 것 못 느끼고 살아왔는데 이렇게 누군가에게 처참하게 무시당한 것이 처음이라 무척 당황스럽고 그 후유증이 매우 오래 지속됐다. 그렇게 5~6개월이 지났을 무렵 아내가 자기를 봐서라도 한 번만 더 부산에 내려가자고 했다. 절대로 다시는 안 가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아내의 계속된 부탁에 한 번만 더 내려가기로 했다.           



장인어른께 날린 강펀치 한 방

첫 만남이 워낙 강렬했기에 두 번째 방문은 크게 긴장되지 않았다. 두 번째 마주친 아버님의 표정은 역시나 똑같았다. 그리고 처음과 마찬가지로 또 비슷한 내용의 대화가 오갔다. 아버님은 기자라는 직업을 무슨 바퀴벌레 취급하듯 말씀하셨다. 그래도 나름 내게는 프라이드가 강한 직업인데 말이다. 거기다 키 173인 아내보다 조금 작았으니 얼마나 못마땅하셨을까. 내가 크게 작다고는 할 수 없다. 아내가 평균 이상으로 키가 큰 것이 아니던가. 아무튼 나는 대화 도중 결국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나는 아버님께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그건 TV의 드라마 속에서 대기업 회장님 딸과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남자의 결혼을 반대하는 그런 상황인데 제가 볼 때 아버님 집안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데 아버님은 뭘 보고 그렇게 말씀하세요?라고. 또 나는 "저도 저희 부모님한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소중한 자식인데 그런 자식이 어디 가서 남의 부모님 앞에서 이런 소리나 듣고 있으면 얼마나 속상하실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셨어요"라고 아버님께 강펀치를 날렸다.

       

그 순간 옆에 앉아 계시던 어머님과 아내의 얼굴은 얼음이 되었고 가장 중요한 건 아버님의 표정이 압권이었다. 지금껏 인생을 살면서 이런 반격을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다는 그런 표정이셨다. 결국 나의 질문에 아버님은 말을 얼버무리시며 대답을 못하셨다. 그리고 나중에 하시는 말씀이 그럼 결혼을 하되 혼인신고를 3년 동안 하지 말고 살아보라는 것이었다. 3년 동안 살면서 우리가 자주 다투고 불행하면 아버님의 말씀이 옳은 것이고 우리가 행복하게 잘 살면 그땐 아버님이 자신의 판단과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후회할 것이라고 말이다. 정말 보통분이 아니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명확한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아내와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아내에게 "나는 더 이상 너도 필요 없고 너희 아버님 같은 분을 내 장인어른으로 섬기면서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니 우리 그만 헤어지자"라고. 아내의 반응이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저 그 상황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으며 그런 분을 가족으로 여기며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냥 아내를 만나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내는 끈질기도록 나를 붙잡았으며 정 안되면 그냥 우리끼리라도 결혼하고 살자는 것이었다. 그런 아내의 모습에 적지 않게 감동을 받았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중요한 건 어머님도 우리의 편이었다. 결국 상견례 날짜를 잡았으며 어머님만 자리에 참석하시기로 했다.           


장례식장에서 첫인사를 나눈 장모님과 엄마

어머님은 부산에서 상견례 전날 미리 올라오셔서 당시 아내가 혼자 살고 있던 개포동 아파트에서 하루 주무셨다. 그리고 그렇게 상견례를 하루 앞두고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멀쩡하셨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고 병원으로 바로 달려갔는데 다행히도 크게 걱정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집으로 와서 씻고 잠이 들었는데 밤 12시가 넘어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님이 위독하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병원으로 갔으며 아버지는 혼수상태셨다.


잠이 드신 건지 아무튼 계속 눈을 감고 계셨고 나는 그 옆에 간이침대를 빼서 걸터앉아 아버지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아버지 왼쪽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렇게 주무시듯 새벽 4시에 돌아가셨다. 생각해 보면 확실한 건 아버지 자신이 곧 죽음을 앞둔 것을 짐작했지만 눈을 뜰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바로 옆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슬픔에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란 걸 말이다.     

나는 바로 집에서 자고 있던 엄마와 누나들에게 전화를 하고 친척들에게도 다 전화를 했다. 그리고 장모님은 엄마와의 첫인사를 상견례를 하기로 했던 당일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드라마 같은 상황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장례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식 날짜를 잡고 아내 측 하객은 외가 쪽만 참석하기로 했다. 결혼식 청첩장을 아내의 외가 쪽만 돌린 것이다. 물론 결혼식에도 어머님만 참석하는 것으로 얘기가 끝났는데 결혼식 한 달 전 아버님의 마음이 바뀌셨다. 아내가 아버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빠... 오빠 아버님도 돌아가셨는데 아빠가 우리 둘의 아빠 역할을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정말 이렇게 매정하게 우리 결혼식에도 안 오실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님이 결혼식에 오시겠다고 하셨다는 얘길 들었다. 그래도 마음이 많이 불편했는데 오신다니 다행이었다.           



3년 동안 처갓집에 가는 것은 고통 그 자체였다

우리는 그렇게 서울 삼성동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피로연은 부산에서 제대로 하자는 아버님의 말씀에 결혼 한 달 후 우리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서면에 있는 어느 뷔페에서 했는데 피로연에 참석하신 아버님 지인 분들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현직 판검사, 검사장, 경찰청장, 정부부처 차관 등등 아주 화려함 그 자체였다. 피로연의 중요한 순서들이 지나가고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내 옆에 당시 교육부 차관님이 앉으셨는데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혼식을 왜 부산에서 안 하고 서울에서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자네 아마 결혼을 부산에서 했으면 오늘 온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아버님이 군 시절 서울 남산자락에 있는 바로 그 '중앙정보부'에서 간부로 계셨었다고 한다. 아주 세밀하게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분이셨다. 세상 무서울 게 없고 부러울 것도 없고 누구에게 머리 숙이며 살아온 적 없는 그런 느낌의 삶을 살아오신 분이셨고, 그런 분에게 내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결혼 후 아내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처음 부산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 오빠가 아닌 다른 그 어떤 사람이 왔더라도(직업이 변호사든 의사든 뭐든 간에) 무조건 반대하고 싫어했을 거야..."라고.               

이렇게 결혼의 전 과정이 무난하게 끝나고 별일 없을 줄 알았던 결혼생활이 그렇지만도 않았다.   

  

1년에 설날, 추석, 아버님 생신, 어머니 생신 등등 평균 총 3번 정도 갔었던 것 같다.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결혼 후 처갓집에 가면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설 때 "아버님 저희  왔습니다" 인사 한번... 그리고 2박 3일을 보내고 다시 서울로 오는 날 집을 나설 때 또 현관문 앞에서 "아버님 저희 가보겠습니다" 이렇게 2박 3일 동안 아버님과의 대화는 두 번이었다. 이렇게 2년을 보냈다. 내가 처갓집에 갈 때마다 얼마나 가시방석이고 마음이 불편했을지는 아마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을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더 이상한 건 처갓집에 내려가도 어머님이나 아내도 아버지와 대화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정말 집안 분위기가 적막 그 자체였다. 살라 살다 그런 집안의 분위기는 처음 봤다. 우리 집과는 정 반대의 분위기였다. 정말 적응이 안 되고 부산에 갈 때마다 스트레스가 말이 아니었다.     

 

아버님과 관련해 한 가지 일화를 얘기하고자 한자. 산에 자주 다니시는 아버님은 어느 날 산속에서 운동기구를 이용해 운동을 하시다 허리를 크게 다치셔서 119 구급대원들이 출동해 병원으로 실려 가신 적이 있다. 그리고 수술 후 한 달 가까이 입원하셨다. 당시 소식을 듣고 아내와 바로 부산 집으로 갔지만 병원은 어머님과 아내만 가고 나는 집에 있었다. 이유인즉 아버님이 내게는 사고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병원에 함께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이유는 아버님이 병원에 누워계신 자신의 약한 모습을 내게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비싼 병원비도 본인 돈으로 조용히 계산하셨다. 그 모든 상황을 알게 된 후 정말 아버님이 보통분이 아니란 걸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는 정말 사위로서, 자식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참 허탈하기도 했다.           



결혼 3년 후... 정말 어색했던 아버님의 다정함

우리는 어찌어찌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아버님이 말씀하신 그 3년이 됐을 무렵... 정말 거짓말처럼 그분의 모습이 변하셨다. 거실에서 밥을 먹고 있으면 뒤에서 등을 토닥토닥하시면서 "아이고 우리 사위 반찬도 시원치 않은데 입맛에 맛을런지 모르겠네"라고 하시는가 하면... 밖에서 외식을 한 후 집에 오는 길에 스타벅스에 들러 넷이서 수다를 떨면서 1시간 넘게 앉아있다 나오기도 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모습들이다. 아버님 스스로 3년이 지나고 우리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 스스로 반성을 많이 하고 자신도 많이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나 보다. 결혼 6년이 지난 지금은 거실에서 함께 TV도 보면서 수다도 자주 떨고 한다.

     

부산에 가면 아버님과 어머님, 아내와 이렇게 넷이서 산책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내가 아버님 뒤에서 걸을 때면 아버님의 뒷모습이 살도 많이 빠지시고 머리카락도 많이 빠지시고 아주 왜소하고 약해 보이시는 게 마음이 짠~ 할 때가 있다. 올해도 연세가 77세시니 그럴 만도 하다. 5~6년 전을 생각하면 정말 죽을 만큼 미웠던 분인데 지금은 이렇게 내 가족이 되어 함께 걷고 있으니 앞으로 자식으로서, 아들로서 잘 챙겨드리고, 잘 모시면서 그렇게 살아가려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식 이기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다는 말 하나는 참 맞는 말 같다.  


    

지난 어버이날 아내가 장모님과 나는 카톡 내용을 내게 보냈다.  어머님이 이토록 사랑하는 딸인데 평생 보물단지처럼 소중히 여기고 잘해줘야 하지 않을까...

결혼을 하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아버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한 가지 특이한 건 아내의 친가와 외가 통틀어서 여자가 아내 단 한 명이다. 그러니 아버님의 입장에서 아내가 얼마나 더 소중하게 느껴졌을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딸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이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지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에 대한 진정성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무조건적으로 이해가 간다.


언젠가 아버님이 부산에서 현금뭉치를 담아 서울에 오신 적이 있다. 아내 회사 앞으로 오셔서 돈뭉치를 건네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셨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셨다. 그렇게 아버님이 주신 돈이 상당한 수준의 금액이다. 나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다는 아버님. 내가 알면 해이해질까 봐 그러셨다고 한다. 요즘은 그런 아버님을 생각하면 그토록 밉기만 했던 분인데도 생각할 때마다 뭉클해진다. 


"아버님... 오랜세월 켜켜이 쌓인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을 이제서야 이해를 하게 됐습니다"


결혼 초반에는 성격상의 이유로 예상 밖으로 자주 다투기도 했는데 몇 년 함께 살아오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다. 만약 내가 그렇게도 애지중지 아끼던 딸이 있는데 어떤 놈에게 시집을 보냈다고 가정했을 때 사위 녀석이 내 딸에게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등의 모습을 본다면 아마 나는 내 성격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내에게 그런 행동을 보이는 걸 장인, 장모님이 보신다면 얼마나 속상해하실까...     

이런 생각을 해보면 절대 아내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화를 낼 수 없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다 보니 아내에게 화를 내고 짜증 내는 횟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아주 가끔은 화도 나고 짜증도 낼 수 있지만 말이다. 삶의 90%를 아내에게 맞춰주면서 살다 보니 집안이 참 화목하고 나 스스로도 그게 마음 편하고 좋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고 살고 있는 중이다.

      

결혼을 앞둔 수많은 젊은 남녀들이 정말 다양한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저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뿐... 지금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현명하게 잘 헤쳐 나가면 먼 훗날 그저 그때를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뿐... 그토록 슬프고 힘들었던 과거는 단지 과거일 뿐이라는 것을 지금 힘들어하는 수많은 연인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결혼을 앞둔 과정에서, 또는 결혼생활 도중 지치고 힘들 때 차분하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의 입장에서 또 한 번 생각해 보면 웬만한 문제는 다 현명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가장 속 편하게 사는 건 그냥 내가 무조건 져 주면서 살면 된다. 상대에게 져주는 건 매우 현명한 방법이고 져주는 당신이 이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의 삶에서 매일 져주면서 승리한 삶을 살고 있다. ㅎㅎ

결혼 후 가장 크게 깨우친 게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아내에게 잘하고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장인/장모님께 최고의 효도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맛난 것 많이 사드리고 용돈 많이 드리면 물론 좋겠지만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그냥 아내한테 잘하는 게 최고다! 아내 눈에서 눈물 나는 일 없게 만드는 게 최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