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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르헨 Oct 07. 2021

지나치며 읽는 마음

I 엄마의 시간 : < 노을이 지면, 그 녀석도 곧 오겠지. >

천천히 고개를 들며 이미 백발이 된 머리카락을 손가락빗으로 쓸어넘기는 할머니의 여윈 어깨 너머가 애잔했다.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손주 며느리인 나는, 할머니에게 어쩌면 낯선 여자이기도 혹은 잘 아는 여자일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주변사람들도 동시대를 살아냈던 사람들도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든, 열아홉에 결혼을 했고 일제강점기 끝자락을 지났으며 전쟁을 처음부터 고스란히 겪어온 세대였다.

한국전쟁때 경찰공무원이었던 할아버지는 서울까지 진격한 북한군과의 한강다리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렇게 남편을 잃고 미망인이 된 할머니는 3남매와 오롯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

생계를 위해 바느질을 했던 이야기와 첫번째 이별에 대해 말씀해 주시며 할머니는 덤덤하셨다.

"그때야 뭐. 그런 사람들이 깔렸응게. 그래도 내 솜씨가 좋아서 바느질 감이 많았어. 오래되야서, 잘 생각도 안나. "


두 아들은 훤칠하고 인물이 좋아서 동네에서 인기가 좋았다고 하셨다. 잘생기고 다정다감한 젊은이들은 전쟁으로 청상이 된 엄마에게 살아갈 힘과 이유가 되었으리라.

나는 할머니의 오랜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두 형제가 여동생을 업고 할머니 뒤를 따라 걷는 형상이 꿈처럼 아득히 그려지곤 했다.  


할머니에게 전부였던 두 형제는 몹시 급작스럽게 엄마와 작별했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각각 지병으로 2-3년 격차를 두고 갑자기 소천하셨고, 할머니는 두고두고 본인의 명이 길어 아들들이 가는 걸 보아야 했다고 자책하셨다. 자식의 죽음도 내 탓이 되는 엄마의 시간.

나는 두 장례식의 눈물들 중에 할머니의 모습이 가장 슬픈 눈물로 남았다.

"조금만 더 살다 가지. 육십년 가까이 살아도 자식은 자식인겨."    


어둑한 불빛에서 촘촘한 바느질을 하던 빛나던 눈은 어둑하던 호롱불처럼 명확하지 못하시고, 매일 새벽기도로 성경말씀을 명확하게 외우시던 할머니의 기억이 이제 조금씩 중첩되기 시작하는듯 하다.  

지난 명절 식사를 함께 하러 찾아뵈었을때 할머니는 전처럼 나를 앞에 앉히시고 자신의 이야기를 조용히 여러차례 들려주셨다.

" 애그들이 왜이렇게 많이 컸다냐."
" 그럼요 할머니 이제 저보다도 큰걸요."

" 그려. 혹시 작은 아빠에게 전화 좀 했냐?"

" 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 명절인데 그래도 작은 아빠에게 전화좀 하고 해야지. 어째 그러냐."

" 할머니, 작은 아빠 성함이 XX영 맞죠?"

" 야좀 봐. 즈이 작은아빠 이름도 까먹었나보네."

할머니의 기억속에, 작은 아버지는 살아계셨다.

" 올해 농사가 잘 되었다고 하드만. 원래 느이 작은아빠가 수완이 좋으니라. 오죽 잘 했을라고. 너네 어매네 집에도 하루에 두번씩 자주 들른다드만. 농사를 아주 크게 해서 동네에서 다들 배우러 온단다. 느이 작은집 애들이 올해 대학에 갔지? 지난주에 전화 했더라. "


할머니의 기억은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멈춰져 있는듯 했다.

아버지가 소천하시고 위로가 되었던 작은 아들, 작은 아들네 손주들이 대학에 갔다는 반가운 이야기를 들었던 십수년전의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머무르기로 결정하신 것처럼 할머니는 이전 기억속의 이야기를 지난주에 있었던 일이라며 천천히 일상을 이야기하듯 나지막하게 이야기하고 계셨다.


" 다음주엔 느이 작은아빠가 나를 보러 올라 온댔는데. 언제 오려나. 곧 오긋지."

굳이 할머니에게 이제 작은 아버지는 찾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드려서 무엇하겠는가.

"오시겠죠. 할머니가 기다리는걸 아실테니까요."


아흔 일곱.

시할머니의 연세.


수십년동안 할머니 손 끝에 들려있던 바늘귀처럼, 모진 세월은 힘겹게 아흔 일곱해를 관통했고 할머니는 그나마 가장 행복했던 시간의 기억을 선택하셨다.

어쩌면 길게 노을이 지는 그 저녁즈음이 되면, 엄마의 저녁상을 찾아 아들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꿀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부디 이 땅의 남은 시간동안, 지난 시간속으로 되돌아 가셨다 해도 할머니의 기억이 행복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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