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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숭깊은 라쌤 Nov 06. 2024

싸워서 이기는 법

<교사의 단어 수집> - 아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열등감


명. 자기를 남보다 못하거나 무가치한 인간으로 낮추어 평가하는 감정.




어른들의 학창 시절,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아이였을 때 우린 키순, 생일 날짜순, 이름 가나다순 등 우릴 일렬로 줄 세우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경험했다. 아 참, 성적순도 있었지…… 젠장! 사실 이 중에 제일 싫었던 건 뭐니 뭐니 해도 키순이다. 왜 성적순이 아니냐고? 난 성적이 그리 나쁘지 않…… 그게 아니라 어쨌든 성적이란 내 노력으로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이니 남 탓을 하거나 원망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지 않나. 생일이나 이름은 평등과 자유를 수반하는 나름 합리적인 수단으로 생각되는데 키, 키는 정말 너무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비상식적이다. 우열이 있고, 그 우열은 내 의지나 노력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작고 싶어서 작은 게 아니잖아. 나도, 나도 제발 좀 크고 싶다고요!     

다행히 성인이 되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혹은 애매한 키를 갖게 되었고 지금이야 키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가 거의 없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내 학창 시절의 고민은 나의 것만은 아니었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키 콤플렉스’를 지닌 아이들이 즐비하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 반 배꼬마군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배꼬마군은 전교 남학생 중 가장 키가 작은 학생이었다. 자, 여기서 흔한 선입견으로 이 친구의 학교생활을 그려본다면 아마 괴롭힘을 당한다는 식의 부정적 단면을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절대, 배꼬마군은 고교 시절 내내 웃음을 잃은 적이 없었다. 그는, 소위 말하는 ‘인싸’였다! 그의 주변엔 늘 친구들이 넘쳐났다. 마치 애착 인형이라도 된다는 듯 서로 그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는 친구들의 집착이 이어지곤 했다. 아, 그의 작은 키를 놀리는 이들도 숱하게 많았지만 배꼬마군은 화를 내거나 다투는 법이 없었다. 항상 이를 유연하게 대처하며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야, 이 꼬맹아!”

“쌤, 들으셨죠? 꼭 동창회 열어 주세요, 제가 얘보다 더 클 거예요! 그땐 네가 꼬맹이!”     


어, 이 장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렇다. 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난 2001년 윤정수와 류시원이 출연한 한국낙농육우협회 우유 마시기 캠페인 광고 영상을 떠올렸다!      


#1. 초등학교 시절 키가 작다고 놀림을 주고받던 두 친구 

#2. 놀림을 당하던 친구는 꾸준히 우유를 마신다. 우유 대장!

#3. 10년 뒤 동창회에서 재회한 두 사람. 

#4. 이제 그들의 키는 머리 두 개는 차이가 날 정도로 역전되고 말았다!     


물론 이 글을 통해 우유 마시기를 권장하려는 건 아니다. 나 역시 어려서부터 물보다 우유를 더 마실 정도로 우유 집착남이었으나 키는 크다 말았고 피부는 아주 까맣다. 배꼬마군을 통해 말하고 싶은 건 역시나, 그의 됨됨이이다.     


콤플렉스. ‘열등감’과 유의어로 쓰이는 이 단어로 인해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대한민국이다. 더불어 남의 열등감을 이용해 이를 주변 사람들에게 부각함으로써 자기 승리감에 빠지는 한심한 이들도 많다. 이러한 감정들이 시기, 질투, 미움으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뒷담화와 흑색선전, 비하 발언으로 실현되는 경험을, 다들 겪어 보지 않았을까.     

배꼬마군의 됨됨이라 표현했으나 결국 그는 ‘이기는 법’을 알고 있던 게 분명하다. 놀림을 받았다고 하여 이를 자신의 스트레스로 연결하거나 강력한 스매시로 맞받아쳤다면 아마 그의 주변엔 그를 따르는 이들이 적었을 테지. 패배하지 않기 위해 타인의 콤플렉스를 붙잡고 늘어졌다면 결국 그는 혼자였을 테지.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아니,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 그는 언제나 승리자였다.     


얼마 전 여름의 끝자락에서, 밤 산책을 위해 후줄근하게 입고 집 밖으로 나섰을 때 단지 입구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먼저 인사를 건네시는 그분의 정체는 난 알지 못하였으나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학부모님. 교사들이 겪는 흔한 불편함 중 하나인데 ―후줄근하게 밖을 나갈 수가 없다― 워낙에 밝게 인사하시는 통에 대충 고개만 까딱하고 갈 순 없었다. 어라, 그런데 어머님은 인사와 동시에 뒤따라오던 누군가를 다급하게 부르셨다.     


“어머 어머 선생님, 잘 지내셨죠! 잠시만요. 얘, 너 담임쌤 만났어!”     


어머님을 만난 것도 불편한데 졸업생까지 만나려니 이것 참 골치 아파졌다, 했는데 아뿔싸. 그는 배꼬마군이었다. 잠깐, 그는 더는 귀여운 꼬마가 아니었다. 180에 가까운 20대 멋진 청년이 멋들어지는 패션 감각까지 장착한 채 내 앞으로 다가왔다.     


“너, 너 대체 키가 얼마나 큰 거냐. 그리고 대체 여기 왜 있는 거야?”

“다들 저만 보면 키 큰 걸 묻네요. 엊그제 여기 이사 왔어요!”     


왜 수많은 아파트 단지 중 우리 동네였을까, 가 아니라 정말 반갑고 기뻤다. 대학 합격이나 직업적 성공에 대한 소식만 기쁜 줄 알았는데 아이들의, 겉으로 보기에 근사해진 외양을 보는 일도 꽤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모든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함으로써 많은 이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힘. 알면서도 배우기는 어려운 이 세상의 진리이지만 아니까, 배우고 싶다. 이제 난 더 키가 크는 건 무리일 테니 남들보다 훨씬 더 깊은 내면의 깊이를 위하여, 오늘도 아이들의 세계를 파고 또 파고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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