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맨유
계절은 자꾸만 순환한다. 난 가을이 좋은데, 해가 거듭될수록 계절의 걸음이 빨라져서 좀처럼 붙잡기가 힘이 든다. 금세 떨어진 기온에 별수 없이 옷장을 열고 두꺼운 옷들을 꺼내려는데, 어라? 작년 이맘땐 대체 무슨 옷을 입었던 거지? 왜 입을 옷이 없지? 또 별수 없이 스마트폰에서 인터넷 쇼핑 애플리케이션을 연다. 정해인이다! 남자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 그가 입은 옷을 내가 입으면 나도 그가 될 수 있으리란 착각에 빠져 3개월 할부로 결제를 한다. 자, 그리고 며칠 뒤 난 좌절감에 빠지게 되겠지?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절대 정해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 번 겪었으면서도― 또다시 확인할 테니까.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면! 아무리 내 몸뚱어리가 보잘것없다고 하여도 내게 어울리는 옷 한 벌쯤은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발품을 팔면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다. 이건 나뿐 아니라 세상 모두에게도, 맨유에게도 마찬가지인 사실이다.
퍼거슨 감독의 은퇴 이후 맨유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특히나 가장 최근 실패를 겪은 에릭 텐 하흐 감독의 경우엔 엄청난 지원을 받았음에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왜일까? 그건 정해인이 아닌 자에게 자꾸 정해인처럼 입길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가 활약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던 곳은 잉글랜드 무대가 아니었다. 네덜란드 리그였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의 색채를 똑같이 맨유에 입히고자 했고, 그러다 보니 자꾸 과거 아약스 AFC 제자들을 영입하는 데에만 열을 올렸다. 결과적으로 이는 실패였다. 아예 아약스를 통째로 옮겨놓는다고 스타일 자체가 다른 잉글랜드 리그에서 과연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 의문인데다, 그 ‘통째로 옮긴다’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할 수 있겠으나 텐 하흐가 추구하고자 했던 색채는 맨유라는 정체성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맨유의 경기 스타일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 하나가 있다면 그건 ‘스피드’라 할 수 있는데, 멈추지 않고 달려 나가며 상대를 혼란에 빠지게 했던 ‘박지성-루니-호날두’의 챔피언스리그 4강 아스널전 골 장면을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아마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으로 생각한다. 맨유가 성공 가도를 달리던 시절엔 항상 모든 선수가 미친 듯이 달리고 엄청난 속도를 자랑했다. 그런데 텐 하흐의 맨유는 자꾸 공을 정지시켰고, 선수들은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만 있었다. 공을 가지고 있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제대로 된 공격적인 플레이를 하지는 못했던 것. 상대에게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줘버리니 도통 찬스를 만들지 못했고 그렇다고 수비가 탄탄해서 실점이 적은 것도 아니었으니 경기를 보는 팬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열불이 나 미칠 지경이었을 테다.
우린 늘 성공이란 키워드가 매달린 이들을 탐독한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아니, 아주 훌륭한 태도다. 그런데 그 성공을 겉핥기식으로만 읽어내는 게 문제다. 그 성공을 위한 고난의 과정이나 오랜 인내 따위에는 좀처럼 관심을 갖지 않는다. 치열한 분석과 연구, 그리고 그들의 경험과 성공비결이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걸 사실 우리 모두 알고 있음에도 이를 외면한다. 쉽게만, 그저 빠르게만 무언가를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 자체가 어렵고 힘들다는 걸 알고 있다. 나 역시도 그러한 존재이기에, 나 역시도 욕심만 내세우며 차분하게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기에, 그래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기에,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래서, 다시 한번 되뇌고자 하는 것이다. 내게도 내게 맞는 옷이 있다는 것을!
어쨌거나, 맨유도 빨리 딱 맞는 옷을 입고 화려한 시절의 부활을 팬들에게 선사했으면 한다. 무엇보다 옷을 잘 입으려면 자기 옷을 잘 입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옷을 잘 입히는 사람의 조언을 들어야 한다. 축구 감독에 이를 적용한다면? 자기 색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 그 팀에 알맞은 색을 제대로 입힐 줄 아는 그런 존재가 아마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그게 누구이든 빨리 맨유를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려주길 바란다.
그리고 나 자신과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제안하자면, 우린 이미 충분히 훌륭하고 멋진 존재임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남들을 따라 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당하게 우리만의 옷을 입고 우리만의 길을 걸으며 우리만의 세상을 열어가자는 약속을, 슬며시 건네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