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납작납작 –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시집 『또 다른 별에서』를 여는 시는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라는 부재가 달린 「납작납작」이다. 통상적으로 시인의 세계를 잘 소개할 수 있는 시가 가장 앞쪽에 배치되는 것을 볼 때, 「납작납작」을 통해 균열의 언어와 타자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세계를 살펴보는 것은 적절한 것 같다. 다음은 시의 전문이다.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니 마땅합니까?
「납작납작 –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전문.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우선 볼 필요가 있다. 화백의 그림은 향토적 인물의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평면적 구도의 그림이다. 원근법이 사용되지 않았기에 특히 더 납작해 보인다. 또한 그림의 재질과 색감 역시 화면에 딱 붙은 듯하기에 이러한 세계의 독특함을 더한다. 시는 이러한 화백의 그림을 회화적으로 묘사한다. 다시 말하자면, “박수근적 방법론으로 대상을 볼 때 어떤 결과를 빚어내느냐다.”
1연의 1, 2행인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 한 며칠 눌렀다가’와 4, 5행의‘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있다’, 그리고 6, 7, 8행의 ‘가끔 심심하면 / 여편네와 아이들도 /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는 박수근 화백의 단순화되고 평면화된 구도를 묘사한다. 즉, “한 화가의 납작납작함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는데 성공한다.”
박수근 화백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1연이라면, 2연은 그러한 세계에 대한 시인의 문제의식이 보인다.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습니까?’라는 1연 끝부분의 조심스러운 질문은 2연에 가서 심화된다. 2연의 1, 2, 3행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는 박수근 화백 그림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지만, 객체화되고 타자화된 ‘아낙네’와 ‘여편네’, ‘아이들’에 대한 시선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선에는 타자성을 드러내는 시 세계가 반영되어 있다. 그러한 세계에 근거하여 시를 해석해 볼 때, 발바닥이 없다는 것은 어딘가에도 정착하지 못한 모습을, 입술이 없다는 것은 발언권을 박탈당한 모습을, 표정이 없다는 것은 자유가 없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한 ‘천지 만물’의 타자적 존재들은 ‘한 줄에 꿰어 놓’아지는데, 이것은 각 사람 한 명 한 명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기는 전체주의의 모습 같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의 화자는 하나님께 묻는다. ‘하나님, 보시니 마땅합니까?’ 시의 등장하는 ‘하나님’은 납작해진 인물과 대조되는, 그들을 납작하게 누르고 한 줄로 꿰어버린(적어도 그렇게 시켰던) 기득권 세력을 환유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납작함’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회화적 표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 세력의 억압을 묘사하는 단어로 정착된다.
이는 김혜순 시인이 자신의 언어를 통해 박수근 화백의 그림에 ‘새로운 드러냄’을 보여준다. 분명 시는 묘사로 일관되어 있지만, “대상을 객관적 혹은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왜곡이다.” 박수근 화백의 화법을 빌려와 시를 그려낸 김혜순 시인의 「납작납작」에서는 언어의 균열을 일으키는 시인의 방법론이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시적 대상을 어떤 관념으로 파악하거나 재해석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을 주관적으로 왜곡시켜 언어로 정착시키는 작업”을 통해 대상을 새롭게 드러내는 김혜순의 시 세계는 타자성 역시 부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참고
오규원, 「방법적 드러냄의 세계」, 『또 다른 별에서』, 시집 해설, 문학과 지성사,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