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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Jan 30. 2024

수수께끼를 살아가는 청춘의 분노 -4(完)-

영화《버닝》(이창동, 2018)

 조언, 또는 기만

 관객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종수, 해미와 달리, 벤은 미스터리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었기에 해미가 우는 것을 신기하게 본다. 무슨 일을 하냐는 종수의 물음에는 그냥 이것저것을 하며 노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젊은 나이에 좋은 자동차를 끌며 값비싼 집에 산다. 자기 자신을 위해 요리하는 행위를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의처럼 묘사하는 것을 볼 때, 벤은 스스로에 대한 만족도 충분한 사람으로 보인다. 종수의 눈에 그러한 벤은 ‘개츠비’처럼 보인다. “뭘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돈은 많은, 수수께끼의 젊은 사람들.” 곧 그 시선은 더욱 부정적으로 변하며, 벤을 분노의 근원으로 대상화한다.


 그렇다면 종수를 바라보는 벤의 시선은 어떠했을까. 벤 역시 심리가 잘 드러나지 않는 인물이지만, 파주 집에서 떨을 하며 밤을 보낸 시퀀스를 분석한다면 그가 어떤 캐릭터인지를 유추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파주 집에서 벌어지는 시퀀스가 전체적으로 환상성이 가미된 듯 신비롭게 묘사되어 있기에 의미 하나하나를 파헤치기보다는, 그저 전체적으로 음미하며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벤의 시선과 대사를 통해 그의 심리를 분석함으로써, 그가 종수에게 가졌던 마음을 분석할 수 있다는 것 역시도 분명해 보인다.


 아버지로부터 전유 받은 분노를 가진 종수에게 벤은 자신의 취미를 넌지시 말한다. “난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워요.” 벤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낡고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받아들일 뿐,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말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춘 듯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실존주의에 걸친 채 설명했기 때문이다. 벤의 말에 따르면, 비닐하우스를 비닐하우스로 규정하는 것은 목적성이다. 그렇기에 목적성을 잃은, 즉 낡고 쓸모없어진 비닐하우스는 더 이상 비닐하우스로 규정할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목적성을 잃은 비닐하우스는 비닐하우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비닐하우스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도 같다. 벤은 자연의 도덕으로, ‘동시 존재’의 개념을 빌려와 설명을 덧붙인다. 벤이 종수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한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단순히 자신의 취미인 방화를 옹호하기 위한 궤변으로써 말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뿐일까?


 하나의 가능성은, 벤이 해미를 비닐하우스로 비유하여 자신의 범행을 예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언급했듯 카메라는 종수의 시선을 따라 벤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벤이 해미 살해자라는 증거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또 다른 가능성을 살펴보자. “난 판단 같은 거 하지 않아요. 그냥 받아들이는 거지.” 벤의 말을 살펴보자면, 벤은 세상을 정의하려는 종수와는 정반대의 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벤은 자신의 취미를 말하며 ‘동시 존재’를 끌고 와 세상의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종수에게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삶을 조금 더 산 어른으로서 자신보다 어린 종수에게 조언을 건네는 모습처럼 보인다. 마침 이 장면에서 종수도 벤을 향해 ‘형’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벤이 종수에게 ‘세상은 원래 그렇다, 그냥 받아들이고 즐기라’라는 조언을 건네는 시퀀스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 굳이 정의를 내리려고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시퀀스가 이러한 분석처럼 종수를 향한 벤의 조언이었다면, 그는 종수에게 애정을 품었었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영화에는 벤이 종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다는 정보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예컨대 해미를 시켜서 굳이 종수를 카페로 부른 것, 종수가 좋아하는 작가라고 밝힌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그가 따라 읽는 것, 홈파티를 열었을 때 지루하게 있다가 종수를 보며 미소를 짓는 것 등이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종수의 파주 집 시퀀스는 종수에게 건네는 벤의 조언으로 볼 여지가 다분하다.


 조언자는 그것을 듣는 사람이 조언을 통해 더욱 발전하기를 바란다. 벤 역시 종수에게 다양한 메타포를 통해 수수께끼에 대한 ‘판단 중지’를 내세우며, 그가 성장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벤은 종수가 비처럼 쏟아지는 자신의 조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내면의 분노를 꺼뜨리기를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말은 벤은 간과하고 있었다. 종수의 눈에 보이는 자신은 ‘개츠비’이며, 그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종수에게는 벤과 같은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렇듯, 벤의 조언인 ‘판단 중지’는, 종수에게는 그저 기만이었을 뿐이었다. 만약 종수가 수수께끼를 풀기 그만둔다면, 그것은 ‘즐기는 것’이 아닌 ‘체념’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종수는 그 조언을 들은 날 이후, 부유하고 여유로운 그에게,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가지고 놀다가 살해한 듯한 그에게 분노의 불길을 돌려버린다.


 그것을 알 리 없는 벤은 계속해서 종수를 북돋는다. 비닐하우스가 어떻게 됐냐는 종수의 질문에 그는 깨끗하게 태웠다고 답한다. “그날 거기 갔다가 하룬가 이틀 뒤에.” 비닐하우스를 매일 확인했다는 종수의 말에 벤은 피식 웃으며 너무 가까워서 안보였을 것이라고, 그래서 놓쳤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대사가 마치 자신이 해미를 살해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카메라는 종우의 시선을 따라 영화를 비추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실 벤이 실제로 비닐하우스를 태웠든 태우지 않았든, 벤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벤은 이미 종수와의 대화에서 ‘동시 존재’를 끌어오며 모호하게 말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 벤은 해미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 집까지 찾아온 종수에게 너무 진지하다고 또한번 지적한다. “진지하면 재미없어요. 즐겨야지. 여기서 베이스를 느껴야 해요. 뼛속에서부터 그게 울려줘야, 그게 살아있는 거지.” 그것은 종수를 ‘개츠비’의 마지막 조언이었다. 이미 분노의 근원을 벤으로 정의한 종수는 즐길 여유 따위 없었다.


 벤은 종수와 해미를 둘러싼 세상의 모습 같기도 하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분노를 계속해서 타오르게 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모습을 그저 지루하게 여기는 부조리한 세상. 그것은 청춘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와 닮아있다. 그렇기에 관객은 자연스레 종수의 시선을 따라가고, 해미의 삶에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관객은 그러한 수수께끼 같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종수처럼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분노해야 하는가? 해미처럼 삶의 의미를 찾아서 사라져야 하는가? 혹은 벤처럼, 세상은 원래 그렇다며 받아들이고, 즐겨야 하는가? 수수께끼를 살아가는 청춘의 분노를 보여준 《버닝》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모호한 비닐하우스 속에 영화를 감추며 여전히 수수께끼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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