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조커》, (토드 필립스, 2019)
올해 속편으로 돌아오는 영화《조커》는 2019년 하반기를 뜨겁게 달구었었다. ‘상상 그 이상의 전율’이라는 캐치프라이즈를 가졌던 《조커》는 DC 코믹스의 캐릭터 ‘조커’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개봉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개봉 이후 여러 논란이 있었으나, 그것을 딛고 히어로 영화 최초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달성하기도 했다. 그 인기로 인해 마침내 속편이 계획되었으며, 가장 먼저 밝혔듯 올해 10월, 《조커: 폴리 아 되》라는 제목으로 관객을 또 한 번 찾아올 예정이다.
단순한 슈퍼 히어로 장르의 오직 ‘빌런’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가 재미와 흥행, 비평까지 모두 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두드러지는 이유는 아서 플렉의 심리적 변화가 효과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서사적 혼란과 반전의 효과를 극대화했고, 그렇기에 캐릭터에 몰입한 채 영화를 관람하던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몇몇 비평은 아서가 조커화(化) 까닭을 그의 외부에서 찾는다. 그렇기에 인셀 문제 및 모방범죄 문제로 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다. 물론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말도 있는 만큼 환경적 요인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가장 큰 영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 글에서는 그것이 왜 적절하지 못한 해석인지, 왜 외부적 요인보다 내부적 요인이 크다고 여겨야 하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칼 구스타프 융의 심리학에 따르면, 인간 심리의 심리는 ‘페르소나(Persona)’와 ‘그림자(Shadow)’로 구분할 수 있다. 페르소나란 ‘타인에게 보이길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의 나 자신’이며, 그림자는 ‘나 자신조차 용납할 수 없어서 억압하고 있는 본능이자 약점, 어두운 특징’이다. 이러한 분석에 맞춰서 영화가 비추는 아서 플렉의 삶을 관찰해 보자.
아서의 페르소나는 ‘아서 플렉’ 그 자체다. 그는 코미디언을 꿈꾸는, 혹은 코미디언을 직업으로 삼는 평범한 아서 플렉으로서 사람들에게 비치길 원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그가 숨기고 싶어 하는 면, 그림자는 무엇일까? 아서의 그림자는 ‘조커’로 명명할 수 있다. 아서 자신의 정신병, 내면의 광기, 폭력성 등, 그가 사람들로부터 감추고 싶어 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그는 그 부분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며, 그것이 드러날 때마다 자신의 ‘병적 웃음’으로 무의식적으로 전치시켜 그림자를 숨기려 한다. 그가 그림자를 숨기며 페르소나에 집착하게 된 계기는 바로 그의 어머니 ‘페니 플렉’ 때문이다. 아서는 30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페니와의 물리적, 심리적인 파행적 유착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으며, 또한 아서는 페니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생각한다. 아서의 목표인 ‘웃음을 주는 코미디언’은 페니의 욕망—항상 웃어라, 너는 웃음을 주기 위해 태어났다—인 것이다. 즉 아서는 페니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아서 플렉’이자 ‘해피(=페니가 아서를 부르는 말)’라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만들었고, 아서 역시 페니가 그랬던 것처럼, 페르소나대로 살기 원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페르소나와 진짜 자아의 괴리를 느끼며 갈등한다. 그는 평범한 사람인 척 스탠딩 코미디를 관람하지만, 그들의 코미디를 이해하지 못하는 등 자신이 유지하려 노력하는 페르소나에 대해 한계를 느낀다.
정신질환의 제일 나쁜 점은 사람들 앞에서 아닌 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메모장에 필기한 문장을 볼 때, 그가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음이 더욱 명확해진다. 그렇게 페르소나의 한계를 경험하던 아서는 영화의 중반, 결국 자신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지하철, 웨인 엔터프라이즈 금융사 직원 셋을 살해한 후 화장실에서 춤을 추는 장면에서 말이다. 영화에서 춤은 그림자의 수용으로 추측된다. 즉, 아서가 춤을 추는 것은, 그림자를 숨기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병적 웃음을 짓는 행위와는 반대로, 그림자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행위로 보인다. 물론 이 장면 이전에도 춤을 추는 아서의 모습은 등장한 적이 있다. 친구 ‘렌달’에게 권총을 받은 뒤, 그것을 쥔 채 집에서 즐겁게 춤을 추는 장면에서다. 그때 아서는 어머니의 소파를 겨누고 실수로 방아쇠를 당겨버린다. 어머니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는 아서의 심리, 즉 페르소나를 지우고 싶어 하는 그의 무의식이 드러난다. 이 장면에서 아서는 춤추기를 멈추고 오발 사격 사실을 숨기는데, 그때까지는 그림자의 모습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심리로 보인다.
아무튼, 이러한 몇 가지 예시를 종합해 볼 때 아서가 내면의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춤을 추는 행동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할 수 있다.
금융인 셋을 살해한 아서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림자에 열광하는 모습을 본다. 사람들은 아서의 그림자, 다시 말해 ‘조커’를 저항의 상징으로 사용하며 그를 미화하고 추종한다. 그의 가면을 쓰고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아서는 그런 모습을 보며 남몰래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추종받는 그림자와 다르게, 페르소나의 상황은 여전히 시궁창이다. 아서 플렉은 여전히 무례한 대접을 받는다. 그는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음에도 전담 상담사, 알프레드 페니워스, 토마스 웨인, 심지어 어머니 페니에게도 무시당하며 푸대접받는다. 심지어 알프레드와 토마스는 아서의 어머니 페니를 정신병 환자라며 비난하며, 아서를 입양아라고 일갈한다. 아서의 대사에서 그가 겪는 슬픔이 드러난다.
“다들 왜 그렇게 무례하죠?”
아서는 토마스에게 치욕을 당한 후 자신의 페르소나를 유지하는 것에 고통을 느낀다. 그가 집으로 돌아온 뒤에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에서 그의 고뇌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괴리를 또 한 번 느낀 아서는 토마스의 일갈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아캄 주립병원으로 향한다. 실랑이 끝에 그는 충격적인 사실을 마주한다. 토마스의 말대로 페니는 망상병 환자였으며, 아서는 페니의 입양아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아서는 페니의 남자친구에게 지속적으로 학대당했으며, 아서의 ‘병적 웃음’ 역시 영화 초반 알려진 것과 달리 외부적 뇌손상에 의한 후천적 장애라는 사실 역시도 아서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아서는 어머니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살아내며 페르소나와 그림자에 괴리감과 한계에 비극을 느꼈다. 이제 그 비극의 원인이 자신이 욕망하던 어머니라는 아이러니한 사실에 웃어대며 절규하기 시작한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아서는 위로를 받기 위해 ‘소피’를 찾아간다. 소피는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아서의 페르소나인 아서 플렉을 사랑하는 존재였다. 본래 아서의 이웃이었던 그녀는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서를 보며 자기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자살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이는 스스로 끊임없이 현실 혹은 삶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는 아서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나의 죽음이 내 삶보다 더 가취 있기를.
아서의 필기에서 그러한 그의 욕망이 잘 드러난다. 아서는 소피의 그 모습에서 자신의 욕망적 ‘아니마(Anima)’를 발견했고 그녀를 연모하기 시작했다. 아니마, 그리고 ‘아니무스(Animus)’는 각각 남성과 여성의 정신에 내재하는 이성(異性)적 요소다. 이성에게서 자신의 아니마/아니무스를 발견한다며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것이 사랑의 원리이며, 아서 역시도 그 원리를 따라 소피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영화 내내 소피는 아서의 곁을 지켰다. 그가 스탠딩 코미디 쇼를 할 때도, 데이트를 할 때도, 어머니 페니가 입원했을 때도 함께 자리를 지켰다. 이러한 소피의 사랑은 아서가 페르소나를 유지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아서 플렉이라는 페르소나에게 큰 의미를 주었던 소피와의 관계는 그저 그 자신의 망상이었음이 밝혀진다. 아서 플렉을 사랑한 소피의 모습이 거짓이자 뇌내망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에게는 자신의 페르소나—이자 자신의 인생을 비극으로 만들어 버린 페니 욕망의 결과물—를 더 이상 유지할 의지도, 이유도 없었다. 곧 아서는 병상에 누워 있는 페니를 찾아간다. 페니는 아서에게 ‘해피’라고 부르지만, 그는 한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며 그 이름을, ‘해피’라는 이름에 담긴 인위적 페르소나를 부정한다.
“나는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알고 보니 빌어먹을 코미디였어.”
아서는 자신의 페르소나 ‘아서 플렉’의 삶이, 그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현실에 냉소하며 어머니 페니를 살해한다. 페니를 살해함으로써 어머니와의 파행적 유착관계를 분리한다. 그와 함께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하며 생겨난 페르소나에서도 독립을 시도한다.
어머니 페니를 살해한 이후, 아서가 남들에게 보이기를 바랐던 ‘아서 플렉’은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더 이상 자신의 페르소나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기에, 페르소나와 그림자 사이에서 오는 괴리를 전치시켰던 ‘병적 웃음’ 역시도 등장을 감춘다. 페니를 살해한 아서는 비로소 춤을 추며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인다. 그가 얼굴에 분칠을 하며 ‘조커’ 분장을 하는 것은 그가 그림자를 수용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던 중, 영화는 아서는 그림자의 폭력적 모습을 또다시 비춘다. 친구 렌달을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이 그것이다. 렌달이 아서를 무례하게 대한 것이 살해당한 이유라는 해석도 있으나, 초인종이 울리자 곧바로 가위부터 챙긴 아서의 모습을 볼 때 그러한 해석은 당위성이 부족해 보인다. 자신의 그림자가 누군가에 의해 방해받자 폭력성을 드러낸 것으로 보는 게 더욱 적절하다. 이에 관한 당위성은 극 후반부, 머레이 살해를 볼 때 더욱 그럴 듯 해진다. 한편, 이 장면에서 살해되지 않은 게리는 아서의 페르소나 ‘아서 플렉’을 진정한 친구로 대해주었던 유일한 인물이기에 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등장하는 명장면, 일명 ‘계단 씬’에서는 ‘조커’를 완전히 수용한 아서의 모습을 비춘다. 그는 영화 상 정확히 1분 간 춤에 심취한다. 이 춤은 낮에, 햇빛이 비추는 야외에서 추는 동적인 춤인데, 이는 가장 처음 추었던 춤, 밤에, 아른거리는 조명만이 가득한 실내에서 정적인 춤을 추던 모습과 대조된다. 이것은 아서의 심리 변화를 나타낸다. 화장실에서 추던 정적인 춤은 아직은 그림자를 떳떳이 수용하지는 못했던 아서의 심리가 반영된 모습이라면, 이 계단을 내려오는 춤은 완전히 그림자를 수용한 당당해진 아서의 심리가 반영된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머레이 쇼에 도착한 아서는 머레이에게 자신을 ‘조커’라고 불러주길 청한다. 페르소나를 지우고 그림자를 완전히 수용하려는 아서의 의지가 보이는 대목이다. 본래 아서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공개적으로 비웃은 머레이 쇼에서 자살을 통해 페르소나의 완전한 해방을 맞이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머레이가 아서의 그림자, ‘조커’가 행한 살인을 비난하면서부터 틀어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수용할 수 있게 된 그림자가 비난당하자 분노한 아서는 애초 계획과 다르게 자신의 머리가 아닌 머레이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렌달에 의해 그림자가 방해를 받자 드러난 폭력성과 같은 성질을 띤다. 그러나 앞선 사례와 달리, 공개적으로 머레이를 죽임으로써 페르소나에서 완전히 해방된다.
그 이후 압송되던 아서는 폭동이 일어난 고담시를 보며 만족한다. 그때 그는 전복 사고를 당하고, 추종자들에 의해 풀려난다. 깨어난 그는 광대 가면을 쓴 ‘조커’의 추종자들이 그의 그림자에게 열광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자신의 피로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그림자를 완전히 받아들인 진정한 조커로 각성한다. 후에 그는 아캄 주립병원에 수감된다. 계속해서 웃어대는 그를 향해 무엇이 우습냐고 상담사는 묻고, 그는 재밌는 농담이 생각났다고 답한다. 그것에 대해 물어도 되냐는 물음에 아서는 나지막이 미소를 짓는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 미소는 그전까지 아서가 겪어야 했던 심리적 갈등과 괴리의 아이러니와 더불어 이미 지나버린 그 일들을 바라보는 여유도 담긴 자의적 웃음으로 볼 수 있다. 더 이상 과거의 아서 플렉은 남아있지 않다. 조커만 존재할 뿐이다. 이제 완전한 조커의 모습이 된 그의 모습은 곧 개봉할 《조커: 폴리 아 되》에서 그 실체를 드러낼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 그 이상의 전율’을 선사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