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 《침묵》
들어가며
기독교도는 종종 두려운 상상을 한다. 만약에 신이 없다면, 하나님이 없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적인 생각일 수도, 자신에 대한 연약함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실제로 그분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사람에게는 있는 것을. 그것은 필연적으로 ‘신정론’과 ‘고통의 문제’로 이어진다. 기독교도는 그것을 하나님의 침묵이라고 부른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으로 선교를 떠난 어느 사제의 모습을 포착한다. 독자들은 그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의 고뇌에 동참하고 함께 아파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느낀 감동에도 참여하여 울림을 받는다.
침묵에 대한 탄식
이 소설은 단순히 믿음만을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인물들의 심리와 대사를 통해 의문을 표현한다. 로드리고 신부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으로 선교를 떠난 그는 절망적인 현실을 마주한다. 그는 배교를 강요당하지만, 결코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기독교 신도들의 연속되는 죽음이었다. ‘인간들을 위해 죽으려고 이 나라에 왔던 것인데, 사실은 일본인 신도들이 자기 때문에 잇달아 죽어’가는 상황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한다. 로드리고 신부는 그런 하나님을 향해 탄식한다. 그의 탄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한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인간을 방치하시는가.
하나님의 침묵은 이 세상과 인간의 삶을 부조리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강도는 다를지언정 그러한 부조리함은 여전하다. 부조리 속에 사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두 부류로 나뉜다. 체념하거나 견뎌내거나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그 부조리의 끝을 바라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세상과 삶이라는 부조리극이 끝날 수만 있다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법을 활용하는 것도 얼마든지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숨에 모든 것을 단숨에 해결하는 ‘기계 장치의 신’이 아니다. 그분은 침묵하시며, 얼굴을 숨기시고, 어쩌면 고통을 내버려 두는 모습을 보이신다. 물론 성경에서는 그것이 오해라고 밝히며 침묵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이 그것이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실존적인 고뇌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침묵의 문제는 단순한 성경적 메시지나 교훈을 넘어서 당면해야 하는 믿음의 문제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이곳에서 실족한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당면해야 하는 고통의 문제는 그저 철학적 논쟁이나 신학적 사유를 넘어선 인간 삶의 한 부분이다.
‘기도문을 계속해서 외우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이것으로도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었다. “주여,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당신은 왜 언제나 침묵하고 계십니까?”라고 중얼거릴 뿐…….’
소설에 묘사된 그대로 그의 침묵은 인간을 더욱 탄식하게 만든다. 그러한 탄식은 세상과 삶이라는 거대한 부조리를 결코 해결하지 못함에도, 그것이라도 붙들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불쌍한 영혼이다. 그렇다면 그 불쌍한 영혼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 나약하다면서 비난하고 있는가.
영혼에 대한 연민
이 소설은 순교의 위대성을 알리기보다는 배교의 정당성을 말하는 듯 보이기도 하다. 실제로 소설에서 묘사되는 순교의 모습은 성스럽거나 숭고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죽음 모두를 하나같이 끔찍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순교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현실성을 부각함으로써,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르는 인물들의 믿음을 더욱 강조한다. 또한 《침묵》은 결코 배교를 정당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배교해버린 영혼들을 불쌍히 여길 뿐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기치지로다. 그는 일본인 신도로, 성화를 밟아 배교 했을뿐더러 로드리고 신부를 배신했던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는 끊임없이 로드리고 신부를 찾아와 고해성사를 뱉는데, 그 내용에는 그가 실존적으로 마주하는 부조리에 대한 고통이 녹아 있다.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말고요.’
그의 말처럼 실제로 하나님이 그러한 신이라면, 그 억지스러운 요구를 따라야 하는 인간의 삶은 더욱 부조리할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로드리고 신부는 계속해서 고뇌에 빠진다. 정말로 하나님은 그러한 신인가. 인간을 감당할 수 없는 부조리에 처하게 만들어 놓고는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의 영혼을 정죄하는 신인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러한 고민에 빠져 있던 로드리고 신부는 두 번째 배교자를 만난다. 그는 그보다 이전에 일본 선교를 위해 이 땅으로 왔었던 페레이라 신부였다. 이제는 일본인의 이름으로 승려복을 입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책을 쓰는 그는 여러 일본 선교의 절대적 불가능성을 말하며 로드리고 신부를 회유한다. 이후 자신은 일본인 신도를 지키기 위해 배교했음을 밝히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신도를 지키기 위해 신앙을 버려야 하는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도의 죽음을 방관해야 하는가. 딜레마에 빠진 그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던 그는 결국 배교의 기로에 선다. 그때 그리스도의 성상을 본 로드리고 신부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그제야 로드리고 신부는 성화에 발을 올린다. 인간 구원을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으로 내려와 죽은 하나님이라는 신의 특징을 볼 때, 그 음성의 내용은 설득력을 지닌다. 물론 이것이 배교의 자기 정당화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끝까지 작은 믿음만은 몰래 지킨 로드리고 신부의 모습을 볼 때, 그 음성을 불쌍하고 연약한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연민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지 않을까. 그들을 향한 위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마치며
앞서 말했듯,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단순히 믿음만을 외치지 않는다. 침묵하는 하나님 아래 신음하는 로드리고 신부와 동행하며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 말할 뿐이다. ‘부조리의 순간에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소설은 끝내 그 답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네가 괴로워할 때……. 나도 옆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최후까지 네 옆에 내가 있다.’
독자가 이 책장을 덮은 이후에도 여전히 세상은 부조리하며 인간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여전히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드리고 신부의 삶을 따라간 독자는 그가 내뱉은 위로의 체험과 고백을 떠올릴 것이다. 여전히 그 침묵이 고통스럽겠지만, 이전보다는 덜 외로우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