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나이트》(크리스토퍼 놀란, 2008)
조커는 배트맨의 전통적인 숙적으로 등장해 왔다. 그는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도 메인 빌런으로 활약하며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사실 영화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조커가 배트맨과의 대립 쌍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일종의 기폭제 역할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조커는 배트맨(브루스 웨인)과 투페이스(하비 덴트)를 극한의 부조리에 처하게 하여 서로 다른 결과를 도출하도록 만든다. 조커의 존재로 둘의 대비는 더욱 뚜렷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도구적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다양한 장면을 통해 조커의 캐릭터 특성을 구축한다. 그것이 배트맨과 대립하고 그의 정의를 비웃는 ‘절대 악’으로서의 모습인데, 그것을 통해 관객은 배트맨의 고뇌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조커는 그 정확한 정체성을 규정할 수 없는 것이 정체성인데, 이 영화에서도 조커의 다양한 과거가 등장하며 영화 속 시민들과 영화를 보는 관객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가 입이 찢어진 이유가 규정되지 않은 것처럼, 그는 규정되지 않는 혼돈을 상징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그는 프로이트의 개념 중 하나인 이드의 화신으로도 볼 수 있다. 이드란, 본능의 뿌리로 쾌락과 원리를 따르고 불쾌함은 회피한다. 즉 그는 무의식적인 충동과 욕망을 억제하지 않고 드러내며, 사회적 질서를 무시한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정확한 기원이 설명되지 않은 존재이기에 어디서 그것이 기인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얼핏 드러나는 그의 이야기들을 볼 때, 입가에 새겨진 흉터와 관련된 과거의 상처에서 발현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의 폭력적인 행동은 초자아의 부재로 인한 내면의 혼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기괴한 웃음은 무엇일까?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겠으나, 대표적으로는 모든 질서에 대한 비웃음과 세상과 인간 본성의 부조리에 대한 조소로 볼 수 있다. 조커는 인간의 도덕성과 사회 질서의 허점을 폭로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회 정의에 대한 허상을 비웃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왜 그렇게 심각해?”
조커의 아이덴티티와도 같은 이 대사는 그가 어떤 캐릭터인지를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그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질서의 부조리함을 폭로하기 위해 사회 실험의 성격을 띤 연쇄 살인을 이어간다. 그것은 고담시의 아노미 상태를 강화하며 도시를 더욱 혼란에 빠져들게 한다. 그가 아노미 상태를 강화한 방식은 간단하다. 도시의 부패와 불평등, 사회적 불만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노미 상태를 정화하기 위해 나타난 배트맨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배트맨은 정의를 다시 세우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아노미 상태를 이용한다면, 조커는 이미 붕괴한 시민들의 신뢰와 정치 부패, 경제 불평등 등을 통해 아노미 상태를 가속시킨다. 그렇기에 조커의 등장은 배트맨의 등장보다 더 큰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런 현상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기 위해서는, 조커가 치밀하고도 계산적인 인물이어야 한다. 영화는 조커가 단순히 광기에 빠진 즉흥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오프닝 시퀀스를 활용한다. 여섯 명이 은행 강도를 벌이는 장면에서 서로를 죽이게 만들도록 계획함으로써 조커는 막대한 돈을 챙겼다.
한편, 그 외에도 영화 전반적으로 계속해서 마피아들의 뒤통수를 치며 그의 영악함을 드러냈고, 하비 덴트가 진짜 배트맨이 아니었을 경우를 대비하여 고담 경찰들을 매수하여 납치하는 치밀함까지도 보여준다. 자신이 감옥에 수감 됐을 때도 대비하여 탈옥할 방법 역시 계획한 상태였다.
영화는 이러한 조커의 모습을 통해 그가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혼란이 관객에게 현실적으로 체감되도록 만든다. 빌런의 리얼리즘이 강화되며 관객은 영화에 더욱 빠져든다.
조커는 그 숙적 배트맨과 대립할 때 그 성격이 더욱 두드러진다. 조커는 배트 포드를 타고 달려오는 배트맨에게 자신을 들이받으라며 광기 어린 목소리로 외친다. 만약 배트맨이 자기를 쳐버린다면 그것은 그가 불살주의 신념을 깨버린 것이고, 결국 조커는 승리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배트맨은 조커를 치어 죽일 수 있었음에도 그를 비껴가며 신념을 지킨다. 그것은 조커에게 큰 의미로 작용한다. 이어지는 취조실 장면에서의 대화에서 그러한 조커의 생각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가 말하려는 배트맨과 조커의 관계성이기도 하다.
“아냐, 아냐! 넌… 나를 완성시켜.”
그 말을 증명하려 하듯 조커는 배트맨을 더욱 집요하게 괴롭히기 시작한다. 앞서 말했듯, 배트맨에게 신념과 사적 감정 중 양자택일을 종용했고, 얼굴 반쪽이 불타버린 하비 덴트를 찾아가 그를 투페이스로 타락시켜 버린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것을 배트맨과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사회 실험도 진행한다.
실험의 내용은 이렇다. 먼저 고담을 빠져나오는 ‘시민들이 탄 배’와 ‘죄수들이 탄 배’ 두 척에 폭탄을 설치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반대편 배의 폭파 스위치를 준다. 열두 시가 되기 전에 다른 쪽 배를 폭파하는 쪽은 무사히 생존할 것이며, 만약 양쪽 누구도 스위치를 누르지 않는다면 두 척이 다 조커의 기폭장치로 폭파될 것이다. 그야말로 아노미 상태가 극대화된 상황 속 도덕적 딜레마에 시민들을 밀어 넣어버린 것이다.
조커는 이 실험의 결과를 기다리던 중, 자신을 찾아온 배트맨과 대결하고 그를 제압한 뒤 결과를 지켜본다. 시민들이 탄 배에서는 상대방 배의 죄수들이 폭파 스위치를 누르지 않았기에 자신들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자각한다. 그래도 누르겠다고 나선 시민 한 사람은 상대방 배의 폭파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누르기를 포기한다. 죄수들이 탄 배에서는 그들 중 한 흉악한 인상의 죄수가 기폭장치를 바다로 던지는 바람에 폭파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두 배의 사람들은 서로를 살린 셈이다.
그렇게 양쪽 누구도 스위치를 누르지 않은 채 열두 시가 지난다. 그 결과에 조커는 격분한다. 자기 신념이 완전히 부정당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실험을 통해, 사회적 규범이 무너진 상태라도 인간의 도덕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오히려 확인됐고, 범죄자들에게도 조금의 선함은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되어 버렸다. 세상을 향한 조커의 조소는 이번에는 실패한 것이다.
그 사이 배트맨은 조커의 기폭장치를 빼앗고 그를 제압한다. 그리고 배트맨은, 모든 인간의 내면이 너처럼 추악하지는 않다며 일갈한다. 또한 격투 끝에 아래로 떨어지는 그를 거꾸로 붙잡는다. 이때 카메라는 의미심장하게 회전하며 거꾸로 매달린 조커를 정방향으로, 그 배경이 되는 세계를 역방향으로 비춘다. 조커가 보는 세계는 그야말로 부조리하고 광적인 세계다. 광적인 세계에서 광적이지 않은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라고 가정할 때, 조커의 시선에서 그의 모든 광적인 행위는 정상적인 행위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도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카메라가 조커를 중심으로 정방향으로 비추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너란 놈은 날 도저히 죽게 둘 수가 없었나 보군. 무엇이든 뚫는 창이 무엇이든 막는 방패를 만나면 이렇게 되나 봐. 네놈을 타락시키는 건 정말로 불가능하군. 같잖은 정의감에 죽이질 못하잖아. 나도 널 안 줄일 거야. 너는 너무 재밌는 놈이니까. 우린 평생 이러다 죽을 운명인가 봐.”
“네놈은 정신 병원에서 평생 썩을 거다.”
“그러면 같은 방 쓸까? 요즘 동네 꼴 보면 정신 병원에 방이 안 남겠던데.”
“방금 네 눈으로 봤을 텐데. 이 동시엔 아직도 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
“천만의 말씀. 얼마 못 가 다들 무너질 거야. 하비 덴트의 이중성을 목격하고 놈이 한 짓들을 본다면 말이지.”
둘의 마지막 대화에서는 상호작용하는 두 인물의 심리를, 특히 배트맨을 향한 조커의 심리를 볼 수 있다. 여전히 조커는 배트맨에게 집착을 보이고 있으며, 두 인물이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점 역시도 꿰뚫고 있다. 조커가 정신 병원에 가야 할 비정상적 상태라면, 밤마다 박쥐 옷을 입고 범죄와 싸우는 배트맨 역시도 비정상적 상태임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 여전히 인간의 선을 믿는 배트맨에게, 조커는 그들이 희망의 상징으로 여겼던 하비 덴트를 타락시켰음을 알려주며, 자신이 끝끝내 승리했음을 선포한다.
이처럼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단순히 광기에 찬 악당이 아닌, 인간 본성의 어둠과 사회적 질서의 불완전함을 폭로하는 캐릭터로 볼 수 있다. 또한 배트맨과 투페이스를 대립하게 만드는 설계자의 역할과 더불어 배트맨의 고뇌를 심화시키는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의 기괴한 웃음은 질서에 대한 조롱과 인간 도덕성의 한계를 여전히 조롱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주었듯, 우리는 그 조롱 가운데서도 정의를 바라보며 인간의 선함을 믿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