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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리 Jun 14. 2024

나는 왜 사는 게 힘들까?

written by 오카다 다카시


그레이존(gray zone): 회색 지대 혹은 경계 영역.
어느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 지대.

 


자폐 스펙트럼 장애, ADHD, 지적 장애, 학습 장애, 발달성 트라우마 장애, 경계성 인격장애, 강박성 성격장애, 사회적 의사소통장애, 발달성 협조운동장애, 진단 기준은 없지만 이미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HSP(highly sensitive person, 너무 예민한 사람)까지. 


책에 등장한 진단명만 해도 대략 10개. 게다가 이 진단에 딱 들어맞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 바로 회색 지대, 그레이존이다. 이들이 사는 게 힘든 이유는 증상이 경미하거나 어느 하나에 딱 들어맞지 않은 이유로, 이에 맞는 처방이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데 있다. 경미한 증상은 어떤 점에서는 축복이지만 무심코 지나치다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 


사는 게 너무 괴로워서 병원을 찾았지만 장애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을 때, 그냥 그 사실을 가볍게 받아들이면 되는 걸까? 살기가 힘들다고 느끼는 것도 그냥 가볍게 생각하고 넘기면 되는 걸까? 실제로 수많은 케이스를 상담하고 치료했던 경험에 비춰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레이존이 장애로 판정받은 사람들보다 더 심각하게 힘든 경우가 많다. P13


자폐 스펙트럼 장애, 아스퍼거 증후군, 사회적 의사소통 장애? 아이를 표현하는 단어가 별로 없다고 느꼈다. 어느 것도 맞지 않았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이미 사라진 진단명이고 자폐 스펙트럼의 경우 진단을 받았지만 증상이 경미하다. 게다가 아이는 이제 만 여덟 살, 앞으로 훈련과 노력에 따라 자폐 스펙트럼 범주에 속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나는 버리지 못했다. 


그레이존이라는 용어는 유아기처럼 아직 증상이 확실치 않아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없을 때 사용하는 경우, 그리고 청년기나 성인기에 증상이 나타났지만 진단 기준에 전부 해당되지 않아서 사용하는 경우 등 두 가지가 있는데 각자 사정이 다르다. P14


그런데도 아이가 가진 남다름, 예민함, 불안 혹은 완벽주의 같은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도 아이를 관찰하고 특별히 필요한 부분이 없는지 살피는 이유다. 느리거나 예민하거나 눈치가 없거나 감각이 민감하거나 조절을 못하거나 산만하거나 불안하거나 등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세상은 녹록지 않다. 힘들고 아프다. 작가는 이들을 그레이존이라고 부른다. 장애는 아니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아마 내 아이도 그레이존에 속할 것이다. 자폐와 비자폐, 경계에 있는 존재. 


이 책은 그레이존을 설명하고 이에 해당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한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힘들고, 같은 행동을 고집하고,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남들보다 몇 배로 예민하며, 주위가 산만하여 정리를 못하고, 몸의 움직임이 어색하거나 공부가 유독 힘든 사람들. 작가는 그레이존을 소개하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각각의 케이스에 따라 접근 방식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몇 가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레이존에 해당하는 것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앞으로의 방향에서 유리하며, 개인적 노력에 따라 충분히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교육과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레이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책에 힌트가 있다. 가령 지적장애의 경우 IQ 70 미만이 지적장애로 진단받는데, 비율로 따지면 약 2.2%. 그런데 IQ가 70 이상 85 미만의 경우는 지적장애의 그레이존으로 10%에 달한다. 비단 지적장애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ADHD의 경우 유병률이 10%에 달한다는 보고도 있다. ADHD는 아니지만 집중력과 조절력에 문제를 가진 그레이존의 아이들의 수는 아마도 상상 이상일 것이다. 여기에 자폐 스펙트럼 장애까지 고려한다면, 그레이존을 포함해 정신 장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사이먼 베런코언의 “패턴시커”의 문장을 빌리자면 일부 학자는 자폐에서 ADHD까지, 난독증에서 통합 운동 장애까지 다양한 장애를 고려하면, 인구의 최대 25%가 신경다양성 범주에 속한다고 추정했다. 여기서 신경다양성은 그레이존과 큰 틀에서 동일한 의미다.  


그레이존은 인구의 25%에 해당하지만 사회는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가령, 의학적으로 자폐 스펙트럼 진단의 범주는 확장되고 있지만, 이 범주안에 있는 사람들은 장애로 인정받지 않는다. 의학적으로는 장애지만 사회에서는 장애가 아니다. 장애 등록을 받기 위한 일부 부모님들의 노력이 처절할 뿐이다. 


사견이긴 하지만, 의학적으로 진단을 받았으나 장애 등록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바라지 않는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니까. ‘공정’에 대한 생각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까. 다만 부디, 차별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애든 그레이존이든 뭐든 스스로 질문해 봤으면 좋겠다. 과연 나 자신이 그레이존이 아닌 인구 75% 해당할 자신이 있냐고. 


앞으로 10년 후, 발달장애는 장애가 아닐 수도 있다. 또 의학적인 진단명이라고 해서 객관적이고 영원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10년만 지나도 지금 쓰고 있는 진단명은 다른 것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명칭뿐 아니라 진단 개념과 체계 자체가 변경될 가능성도 있다. 현재 쓰이고 있는 DSM의 진단 기준은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에 의한 분류지만, 병의 상태에 다른 진단 기준을 모색하는 시도 역시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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