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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리 Aug 23. 2024

장애시민 불복종

written by 변재원



광장으로 나선 '못된' 장애인 변재원의
시민권 투쟁기




책을 다 읽은 뒤 작가 이름을 검색하니 '못된' 장애인이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했다.


동정이나 시혜에 감사하고 사회 구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착한' 장애인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를 인지하고 장애인이 누려야 할 권리를 당당하게 외치는 '못된' 장애인. 나는 못된 장애인 변재원을 응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응원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투쟁의 의미를 받아들이면서 나에게 닥친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이 나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투쟁을 알기 전의 모습을 가끔 돌이켜본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고등학교를 끝까지 다닐 수 없었던 날들의 슬픔, 장애를 이유로 학원에 등록하지 못할 때 나를 응대한 안내자의 난처한 표정 앞에서 느꼈던 절망, 몸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고 부속된 사회적 시선과 차별의 날카로움. 나는 왜 투쟁의 의미를 마주하지 않은 채 혼자 발버둥쳤던 걸까. ‘병신’이라 불리는 사람이 ‘정상인’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되뇌었던 과거의 나는 무엇을 이기고자 했던 걸까. p135


작가의 입에서 나온 ‘병신’이라는 말이 아팠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 여기에서 나는 ‘장애’를 은연중에 빼고 말하곤 했다. 내 아이는 장애가 아니라고 이 정도면 괜찮치 않냐고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다. (사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굳건하게 믿고 있다.) 내 입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는 풀네임이 나오기까지 사실 시간이 좀 걸렸다. 작가가 ‘병신’이라는 말을 썼을 때, 지금까지 그가 겪어왔을 온갖 차별과 부정적 시선 혹은 비하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아니,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모를 것이다. 나는 장애인의 삶을 살아본 적 없으니까.


나는 아마도 장애운동에 입문하지 않았다면 투쟁을 영영 잊은 채 악착같이,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작은 키, 목발 없이 설 수 없는 다리, 단 한발도 떼지 못했는데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휘청거리는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 나 같은 장애인이 몫을 챙길 수 있는 길은 투쟁이 아니라 성공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오랜 믿음이 깨지는 그 순간, 활동을 막 시작할 당시 장애운동 현장에서 목이 터져라 투쟁을 외치는 여러 중증장애인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의 평탄한 모습과는 달리, 거리에 선 장애인들의 움직임은 저돌적이었다. p126


장애인으로서 비범하게 성공한 장애인도 필요하고 사회를 향해 투쟁하는 용기있는 장애인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공한 장애인과 투쟁하는 장애인이 마주할 때 긍정적 의미에서 시너지 효과가 난다고 믿고 있다. 솔직히 믿고 싶다. 이것에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더라도, 내 아이가 성공한 장애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투쟁하는 장애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마음이 그렇다. 욕망인지도 모르겠다. 비겁하더라도 나는 방구석에 앉아 투쟁하는 장애인을 응원하겠다. 이들의 투쟁에 손가락질 하지 않고 투쟁이 행여 불편함을 남기더라도 이를 감수하며 묵묵히 살아가겠다. 인스타에 장애인 운동 소식이라도 있으면 "좋아요"를 빠짐없이 누르고 가끔은 장애 관련 책도 읽고 장애인 행사에도 참석하며 조용히 응원하겠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들을 응원하는 것조차 내키기 않았다. 책에도 여러 번 등장한 전장연 대표 박경석.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흰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지하철을 세우고 휠체어를 들이미는 그는 내 눈에 독기가 가득해 보였다. 장애인 이동권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그 방식에는 동의하지 못했다. 책을 다 읽은 뒤 미안하다. 이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잊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박경석 활동가였다. 앞선 못된 장애인 중 가장 못된 장애인이었다. 이제까지 언급한 모든 장애인을 악인으로 조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때 해병대 정신으로 세상을 격파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철없는 비장애인 남성이었다. (중략)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행글라이더를 타던 중 추락했고, 그 뒤로 휠체어 신세가 되었다. (중략) 열심히 성경을 읽고 ‘회개한’ 그는 세상 밖으로 나와 예수님의 사랑 말씀을 실천하는 착한 장애인으로 살기를 꿈꿨다. (중략) 그러나 박경석은 지금의 자신을 만든 노들 장애인야학을 자기 인생을 망친 구원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노들 장애인야학을 다니며 자신을 향한 사회의 갖은 칭찬이 절대로 영원하지 않고, 한순간의 동정과 시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p154


우리나라에서 장애인 출현율은 약 5%, 이 비율은 장애인으로 등록된 사람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실제로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있지만 장애 등록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고려하면 장애인 출현율은 상당 부분 올라갈 것이다. OECD 평균 장애인 출현율이 15% 수준이고, 유럽 대부분 국가의 경우 20%를 상회한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경우 장애등록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중 일부는 국가가 규정하는 장애의 범주에 속하지 않거나, 차별을 이유로 장애인 등록을 거부하거나, 장애인 혜택이 미비해 장애인 등록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거나 등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전장연이 주장하는 장애인 이동권의 영향을 받는 사람의 숫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


여기에 거동이 불편한 노인, 임산부와 영유아를 동반한 사람과 같은 교통 약자를 고려하면 전장연이 주장하는 이동권의 대상은 더 넓어진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 저상 버스 확대, 보도블록 턱 낮추기 등 이건 장애인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교통 약자가 될 수 있고, 노화든 질병이든 사고든 어떤 이유로든 장애인이 될 수 있으니까.


정세랑 작가가 쓴 소설 "피프티 피플"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 그거 알아?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들은 유가족들이 많은 거야."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 세상에 남은 유가족들은 비슷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안전법을 만들어 나간다. 나는 유가족들의 안전법과 전장연의 이동권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안전법이든 이동권이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미래의 우리가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 마땅히 있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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