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아홉 살 아이의 가을(2024.09-2024.11)
1학년 때 만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엄마들 모임이 있었다.
다들 외동이라 종종 만나 어울렸다. 햇수로 3년, 편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가끔 차를 마시며 아이에 대한 고민, 교육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사이였다. 나를 포함해 모두 여섯, 그중 두 명은 워킹맘이라 거의 만나지 못했지만 나머지 네 명은 아파트 단지에서, 학교 앞에서, 놀이터에서 종종 마주쳤다.
엄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들이 함께 놀기도 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은 내가 가장 먼저 자리를 떴다. 아이가 유독 한 친구와 부딪혔기 때문이다. 아이들 사이에 분쟁이 있을 수는 있지만, 상대 아이가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내뱉는 편이라면, 내 아이는 그 말에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편에 가까웠다. 한껏 감정이 격해진 아이는, 나에게 오라는 말도 듣지 않았다. 놀이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이와 이야기 나누며 상황을 정리하려던 계획은 번번이 실패였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엄마들에게 인사를 한 적도 있고, 인사를 하지 못하고 나온 적도 있고. 그런 일 이후에는 내 아이와 다툼이 있던 아이의 엄마에게 연락해 상황을 설명하곤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먼저 오게 되었다고. 때로는 아이가 화를 조절하지 못해 고민이라는 말을 흘리기도 했다. 아이는 다른 엄마들이 보는 앞에서, 엄마들이 싫어할 만한 말과 행동을 보일 때가 많았으니까.
그러다가 우연히 나를 제외한 세 명의 엄마가 점심을 함께 먹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었다. 그 안에는 2년 전 영어 교육을 위해 외국에 머물다가 최근 돌아온 한 엄마가 있었다. 나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엄마였다. 나는 그 모임에서 내가 배제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가 그 자리에서 배제된 이유가, '나' 때문이 아니라 '아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 아이와 유독 부딪히는 친구를 제외하고는 다른 아이들은 유순한 편이었다. 솔직히, 그 한 명의 친구도 내 아이에 비해서는 엄마 말을 잘 들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흥분을 하기는 했지만 내 아이와 비교했을 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 모임에서 내 아이만 없다면, 아마도 큰 언쟁은 없을 것 같은 조합. 누가 어느 학원에 다니고, 누구는 선행을 몇 학년까지 끝내고, 누구는 차분한 데다가 공부도 잘해서 부럽다는 말이 화제로 오르는 모임이었다. 그런 자리에 눈치 없이 내가 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아... 그래서 내가 배제됐구나. 어쩌면 애초부터 내 아이가 배제됐는지 모른다.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계속 퍼즐을 맞춰갔다. 몇 가지 그림이 자연스럽게 맞춰졌다. 생일 파티 초대에 왜 나만 당일 오전에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이들을 데리고 같이 놀러 가자는 내 말에는 다들 망설였는지, 그러다 결국 못 가겠다는 대답을 들었는지. 배신감 비슷한 것을 느끼기도 했지만 실은 외로움에 가까웠다. 이제 나도 혼자가 되었구나. 너도 나도.
며칠간 이 일로 마음이 쓰라렸다. 내 아이를 보란 듯이 공부 잘하게 만들 거야, 같은 별 시답잖은 복수심에 불타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나 역시, 공격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친구로부터 내 아이를 보호하고 싶은, 같은 마음을 가진 엄마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결국 그 모임에서 자발적으로 완전히 나와 버릴까, 생각도 들었지만 인간관계라는 게 가입과 탈퇴처럼 명쾌하지 않은 일. 이제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지난 3년 동안, 가끔 만나 차 마시고 이야기 나눴던 그 시간들을 감사하기로 했다. 그중 만나서 이야기 나누면 마음이 편했던 한 사람에 대한 관심도 이제는 접는다. 다만 내가 만나고 싶을 때, 한 두 명 연락할 수 있는 정도로만 남겨 두기로 한다.
이 정도 거리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