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을 견디는 법
실망은 경력직이 견뎌야 하는 무게구나.
내게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는 누군가 내게 실망하는 것이다.
그 누군가가 아무 나는 아니고(내가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 내게 실망하는 건 그냥 ‘왜 저래’ 해버리면 되지만) 내가 인간적으로 혹은 업무적으로 얽혀있고 존중하는(혹은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어설픈 완벽주의와 착한 사람 증후군을 가진 나는 그 실망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서 그 상황이 닥치기도 전에 도망가 버린 경우도 있었다.
첫 이직을 한 지 이제 한 달. 입사 첫날부터 ‘수습 발표’라는 게 있고 경력직으로 들어온 나도 이걸 준비해서 통과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황당하면서도 수습 기간 동안 파악하고 진행한 업무와 앞으로 진행할 실무를 간략히 정리하고 발표하는 정도이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플랜을 생각했으나, 그 무게와 중요도는 훨씬 더 컸다. 나보다 이전, 꽤 최근에 들어온 경력직들은 모두 인사를 나눌 때마다 나의 수습 발표를 걱정해주었다. 자신들도 전에 이를 준비하고 진행할 때 너무 힘들었다며. 대리 말 급으로 들어왔지만 수습 발표를 잘 못해서 두 번 한 사람, 아예 떨어진 사람 등의 사례를 들으며 마음은 점차 무거워졌고 실제 사람들의 수습 발표 자료를 받으며 몸도 굳어갔다. 시장분석, 소비자 행동 이론부터 일정과 예산 플랜까지 기획된 아이디어들. 신사업 제안 수준의 깊이 있는 발표자료였다. 이걸 입사한 지 2달 만에, 그것도 경력직으로서 실무를 진행하면서 준비하고 발표하라는 말인가?
그 말이 맞았다. 물론 수습 기간 동안의 실무로 아주 긴급한 게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해야 하는 일과 교육을 들으면 대부분의 근무 시간이 지나는 상황에서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들어온 회사의 룰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정 따를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면 퇴사하는 것 외에 방법은 없었다. 틈틈이 레퍼런스가 될 만한 것들을 찾고, 공부한 제품의 특성을 고려하며 대략적인 아이디어와 방향을 정리했고 이를 이번 주 금요일에 팀 내부에 공유했다.
사수 매니저와는 논의하며 내용을 꽤나 정리했다. 물론, 그의 표정과 피드백에서 현 실무자 관점에서 내 아이디어와 제안이 뻔하고 업무 로드가 커서 현실성이 없다는 느낌은 충분히 받았다. 실제로 그런 부분도 있다는 걸 알기에 크게 부정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아직 많이 모를 때만 무식의 용기로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는 패기로 어느 정도 합의를 이끌었다. 해야 하는 걸 알지만, 실질적으로 이 일을 현실화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과 협업이 쉽지 않고 의도치 않게 다른 담당자들의 얼굴을 붉힐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시작조차 하기 어렵다는 건 잘 안다. 첫 직장에서 4년 넘게 일하면서 나를 힘들게 했던 일이기도 하고.
문제는 팀장에게 보고할 때였다. 대체적으로 돌려서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이 정도 수준의 아이디어는 내부적으로도 늘 있어왔고, 신입도 낼 수 있는 거고. 나라는 사람이 경력직으로 뽑힌 이유는 이거보다 더 구체적이고 디벨롭이 된, 바로 실행할 수 있을만한 거여야 한다는 게 골지였다. 몇몇 표현은 돌려 말하려다 실패해서 직접적으로 전달되었고, 나는 그의 실망과 골치 아픔과 짜증을 견디는 그 순간도 이유도 납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분노가 일다가도 먹고살려고 결국 일하고 있는, 이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이상 이 발표를 해야 하는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의식의 줄을 열심히 잡으려 노력했다. 틀린 말은 없었고, 현실은 그러니까.
나에게 큰 기대를 갖고 많은 노력 끝에 나를 자신의 팀으로 데려온 상황을 알았기에 그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모습은 많이 괴로웠다. 하지만 더 큰 괴로움은 내가 나 자신에게 실망한 데서 왔다. 스스로 아이디어가 엄청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일정 시간 이상을 투자하고 계속 고민하면 그래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아이디어는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이를 잘 설득하고 구체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믿어왔다. 한데 그 믿음이 강하게 흔들리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사실 시간은 충분히 있었잖아, 아니 있어도 그렇게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을까?
경력을 1년 이상 후려 쳐놓고 내가 무슨 엄청난 경력자인 것처럼 기대했다는 뉘앙스로 말하네?
그런 거랑 상관없이, 내가 아이디어가 그렇게 뻔한가?
다 생각했던 아이디어면 왜 이 회사는 실행을 안 하고 있는 거지?
한쪽이 명확히 잘못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한 의심의 말들과 이 회사를 향한 분노의 말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에 늘어졌고 이를 또 지워내면서 그 시간을 버텼다. 금요일 퇴근 직전의 시간부터 퇴근 시간을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머리를 아래로 내리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조금 글썽인 것도 같다. 그 눈물은 그 피드백과 회사를 향한 분노로 인해서 라기보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의심이 더 괴로워서일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의심하도록 두었다는 점이 더 큰 실망으로 다가왔다. 경력으로 계속 이직할 생각이라면, 아니 그냥 일을 앞으로 계속해나갈 생각이라면 그런 식의 피드백과 실망은 계속 있을 것이 뻔하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의심하고 무너질 순 없지 않나. 실망을 견뎌내는 것도 경력직의 무게이다.라는 걸 이렇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해 수습 발표를 준비하고 진행하기로 주말 내내 결심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던, 내가 갖고 있는 제1의 일 원칙,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일하자’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고민하고 기획하면 어느 정도의 마케팅 적인 인사이트와 솔루션이 나올 수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고 스킬 업하며 자신감을 쌓을 수 있는 스텝으로 이것을 만들어 버릴 계획이다. (아주 잘 해내서 내가 회사를 나갈까 봐 모두가 걱정하고 불안하게 하는 것이 최고겠지만, 그건 일단 둘째 치고,) 후회 없이 잘 해낸 후 이 회사가 나를 테스트했듯, 나도 이 회사를 테스트하면 되는 일이다. 그 두 가지 의미로, 두고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