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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그리휴먼 Jan 10. 2023

무이림

고요하고 단정한 너를 닮은 곳

‘해가 뜨고 지는 곳, 거기에서 또 보자.’  


해가 뜨는 건 동쪽이고 지는 건 서쪽이지만 해가 뜨고 지는 걸 다 볼 수 있던 그곳, 너와 닮았던 곳, 무이림을 말한 거란걸 바로 알 수 있었다.

  

3년이 지났다. 관계를 규정하지 않은 채 다른 하늘 아래에서 코로나를 맞이한 우리는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다시 만나지도 연락을 나누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일 년의 마지막 날이면 자꾸만 그곳이 떠올랐다. 너와 닮은 그곳에 서있는 쓸쓸하고 단정한 네 뒷모습이 그려졌다.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아닌 지, 너도 나처럼 그곳에 있는 내 모습을 그려 보긴 하는지 알 길은 없지만.


12월 30일, 하루 전에 그곳에 도착했다. 태안의 눈 덮인 풍경을 지나 구불하고 정다운 길을 표지 따라 열심히 가다 보면, 등뒤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릴 것 같은 입구가 보인다.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여기부터는 조금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될 거라고 알려주는 인사. 너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데스크에 들어가 체크인을 하고 푸른 대나무와 은은한 조명이 꾸며진 길을 걸어 방으로 안내받았다. 겨울의 추운 냄새가 방안의 향기로 바뀌고 은은한 온기와 따듯한 햇살을 머금은 우드톤이 눈 안에 포근히 담긴다. 침대 위 가지런히 놓인 내 이름이 적힌 안내장을 집어 들어 가만히 읽어본다. 이 글을 읽어주던 은근히 들떠있던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거실로 나가 물이 빠진 바다를 향해 나있는 문을 활짝 열었다. 햇살이 조금씩 윤슬을 만들어 내는 이른 오후. 소나무들 사이로 뻘과 바닷가를 보면서 거실에 준비된 차를 내렸다. 구비된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면서 나는 이곳이 너와 참 닮았다고 말했던 걸 생각했다. 고요하고 단정하다고. 왠지 이 차도 네가 준비해두었을 법하다고. 맛을 보면 어떤 종류인지, 어떻게 마시면 되는지 알고 있을 것 같다고. 너는 웃으면서 차를 마시는 건 좋아하지만, 아는 건 전혀 없다고 머쓱해했다. 결국 둘 다 잘 모르는 다기를 제멋대로 이리저리 궁리하며 사용해서 차를 내려 마셨다. 차에서 올라오는 증기를 맡으며 그때가 생각나 피식하고 웃었다.


간단한 다과와 마실 거리가 준비된 카페로 갔다. 웰컴티로 준비된 달큰한 맛차라테를 한 모금하고 더 달콤한 초콜릿 한 알을 입에 굴리며 무이림의 정원을 거닐었다. 이곳은 보이는 모든 길과 장면이 단정했다. 대나무 하나도 허투루 심어지지 않은 것처럼, 모든 존재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존재했다. 그리고 동시에 고요했다. 말이 없는 말을 거는 것처럼, 모든 장면이 자꾸만 너를 떠올리게 했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 봤던 낮고 고요한 바다도, 세상에 나만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대나무숲도, 그 사이로 흐르는 차갑고 신선한 겨울 공기도 너를 닮았다. 그래서 무이림을 산책하던 모든 순간이 너를 거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푸르고 차분한 하늘색이 지는 해로 붉게 물들을 준비를 시작할 때, 서둘러 다시 방으로 향했다. 준비된 입욕제를 넣고 욕탕에 물을 받았다. 이 욕탕에서 봤던 노을이 지금껏 본 노을 중에서 최고였다 말했던 너였다. 네 눈에 담겼던 그 최고의 노을을 나도 꼭 보고 싶었다. 가슴 높이 까지 오는 따스한 물안에 들어가자 입욕제의 은은한 쑥향이 마치 노천탕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앞으로는 온 세상이 불타오르듯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지는 해와 바다와 나의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그 순간 그곳에 해와 바다와 함께였다. 살아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들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도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 순간이었지만, 순간이었기에 소중했다. 나에겐 이런 노을이었다고 너를 만나면 말해야겠다고, 우리의 노을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뻣뻣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이부자리에서 포근히 잔 후, 31일의 일출을 보기 위해 누정으로 향했다. 서서히 떠오르는 해와 밝아지는 하늘을 보며 다시금 내일, 이 모습을 너와 함께 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지난번 우리는 일출을 보는 데 실패했었다. 유난히 다음 연도로 넘어가는 날 오전에 안개가 많이 껴서 떠오르는 해를 보지 못한 채 날이 밝아져 버렸다. 아쉬운 대로 밝아진 아침 하늘을 보며 새해에는 무엇을 할지,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할 일 이야기를, 나는 여기서 할 일 이야기를, 그리고 언젠가 다시 우리가 만날 날에 대해 몇 가지는 내뱉고 몇 가지는 삼켜 버렸었다.


매생이 향이 가득한 미음 조식을 호호 불어 먹으며 속을 데웠다. 그리고 다시금 체크인 시간이 다가오면서 나는 하루새 어지 러진 방을 정리했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가다듬었다. 고요하고 단정하며 수려한, 너를 닮은 이곳에 우리가 나눈 마지막 약속처럼 네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거실에 앉아 무이림의 고요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기다렸다. 그리고 그 고요함을 가르며 조심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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