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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Jan 24. 2023

천하제일 대학로열전

 정류장에서 버스 전광판만 하염없이 지켜보며 언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울리는 벨소리를 확인하니 연출님이다. 오늘은 연습이 있는 날도 아닌데,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전화를 받았다.     


“혹시 다음 주 월요일 오후에 시간 돼요? 대학로에서 한국생활연극대상 시상식 있는데 괜찮으면 같이 갈래요?”

“대학로에서 한국생활... 무슨 시상식이요?”     


 솔직히 말해, 나는 그런 시상식이 있는 줄도 몰랐다. 나중에 시상식에 가서야 알게 되었는데 ‘한국생활연극대상’은 전국 아마추어 연극인을 대상으로 (사)한국생활연극협회에서 주최하는 시상식이었다. 아마추어 연극인이란 나처럼 연극을 업으로 하지 않는 직장인이나 자영업자, 주부 등 시민배우를 일컫는다.


 연출님께서 시간 되는 분들은 같이 가자고 하셨는데 시상식이 평일이라 극회 사람들의 참여가 어려울 것 같았다. 다행히 나는 그날이 쉬는 날이었고 다른 일정도 없어 연출님과 함께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찾은 대학로 지하철 벽면에는 자신들의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어느 소극장인 시상식장으로 들어섰다. 계단 아래로 한 걸음씩 내딛으면서 왜 소극장은 죄다 지하에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우리 연습실도 지하인데. 웬일인지 지하 공간이 내뿜는 특유의 냄새가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두운 공간에서 조명을 받아 나부끼는 먼지조차도 오늘만큼은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행사 무대에는 커다간 현수막이 배경으로 있었는데 ‘한국생활연극대상’ 수상자들의 얼굴이 프린팅 되어 있었다. 대상, 공로상, 연출상, 최우수연기상, 우수연기상..... 어랏? 저건 뭐지? 우수 연기상 수상자들 중 익숙한 얼굴. 나잖아?! 내가 우수 연기상 수상자라고?!

 연출님은 서프라이즈라며 일부러 수상 내용을 알려주지 않으셨다고 한다. 너무 좋고 감사한 일이긴 한데... 이를 어쩐다. 연출님, 저 오늘 화장도 안 하고 왔단 말예요. 엉엉.


 (사)한국생활연극협회 정중헌 이사장님과 배우 이순재 선생님의 축사로 수상식이 시작되었다. 사회자가 수상자를 호명하자 웅장하고 경쾌한 음악소리와 함께 멋지게 차려입은 수상자들이 무대 앞으로 나섰다. 이어진 수상소감에서 어떤 수상자는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울먹이며 말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노랫가락을 부르며 감격한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그건 마치 텔레비전 속 연말 드라마 시상식에서 배우들의 단골 수상멘트처럼 '저를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해 주신'으로 시작하는 인사말을 직관(직접 관람)하는 기분이랄까.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객석에서 무대로 나가기 위해 일어섰다. 그나마 여동생이 두고 간 원피스라도 입고 와서 다행이지만 립스틱조차 바르지 않은 얼굴이 부끄러웠다. 곧이어 걱정이 밀려왔다. 수상소감 준비 못했는데 어떡하지. 온갖 생각이 머리를 맴도는 사이 사회자 선생님께서 트로피에 새겨진 심사평을 낭독했다.

위 분은 경기 성남지부가 공연한 정은란 연출의 <폭소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아 활달한 연기와 해학으로 퓨전 고전극의 재미를 살려냈습니다. 수절을 위해 변사또에게 시달림을 받지만 역경을 이겨내고 해피엔딩에 이르는 정절의 여인상을 해냈지에 제5회 한국생활연극대상 우수 연기상을 드립니다.


 팡파르 같은 축하음악이 울려 퍼지고 마이크가 손에 쥐어졌다.


"먼저, 제가 연극할 수 있도록 연기지도 해주신 연출님께 감사드리고요"  


 아. 이 자리에 나오면 다 이렇게 말하게 되는구나. 그리고 진심이구나. 진심으로 감사할 사람이 많구나. 본디 시상식이란 '누가 누가 잘했나' '누가 누가 애썼나' 축하하고 치하하는 자리인데 막상 수상을 하게 되면 도리어 더 감사하고 고마워하게 되는구나.


 수상자들은 연극이 무대에 오르기까지 도움을 주셨던 분들의 이름을 하나씩 읊었다. 그리고 연습과정에서 느꼈던 소회를 밝히며 눈시울을 붉이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연배가 있어 보이는 수상자들의 수상소감이었다.


 연극공연 연습했던 지난 몇 달이 제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인 시간이었어요


 직장인으로, 자영업자로, 또는 주부로서 그 누군들 오랜 시간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작품을 만들기 위해 연습했던 시간이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인 시간이었다고 말한 것은 어쩌면 공연연습과정이 주는 특별한 경험과 느낌 때문이 아닐까.   

 저 배우가 연기한 작품이 무대에서 빛을 보기까지 동료 배우들과 연출, 스텝들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함께 했을까. 물리적인 시간을 넘어 작품 속 배역을 탐구하고 몰입하면서 얼마나 밀도 있는 시간을 보냈을까.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인 시간을 보냈다고 말씀하신, 흰머리가 성성한 수상자께서 가장 잘 아시겠지.


 '누가 누가 잘했나''누가 누가 애썼나'인 줄 알았던 시상식은 사실 '누구누구 덕분에' '누구누구에게 고맙다'로 끝이 났다.

 수상을 한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우린 모두 연극에 진심이었으니까.


 영하를 가리키는 바깥날씨가 무색하게도  대학로 어느 소극장의 온도는 너무, 너무, 너무나도 따듯했다.




<수상식 번외 이야기>


 수상식이 끝나고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시상식에서 촬영한 단체사진을 내 카카오톡 배경화면으로 설정해 놓았는데 그것을 본 엄마가 불현듯 옛날에 꾸었던 꿈이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꿈 내용을 여쭤보니, 내가 대학로 어느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데 장나라 아버지인 주호성 배우와 함께 사진을 촬영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카카오톡 배경화면 사진 속에 주호성 배우가 있냐며 물어보시는 것이었다.


"엄마 거기 있잖아. 가운데 이순재 선생님 바로 옆에"

"엄머 맞네! 맞아!"

"근데 엄마, 그 꿈 말예요. 언제 꿨다고요?"

"한.. 이십 년 된 거 같은데"


 네?!!! 이십 년 전이면 내가 고등학생 때 그런 꿈을 꾸었다고요? 이런 걸 예지몽이라고 하는 건가. 엄마는 당시에 그 꿈을 꾸고 나서 전혀 현실성 없는 전개에 '거참 이상한 꿈이네' 하고 잊고 지냈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정말 신기한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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