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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이 Feb 16. 2023

눈물에도 무게가 있다면

아빠의 눈물은 내 것보다 훨씬 무거움이 틀림없었다.

 키보드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얹은 채 흰 화면 속 깜빡이는 검은 막대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 막대는 오른쪽으로 가야만 했으나 한동안 그러지 못했다. 고민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 계속 고민했다.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조차 이다지도 어렵다.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수록 운을 떼기가 어려운 법이니까.


 나의 아빠 종섭은 나와 동생에게 '나는 살면서 안 해본 일이 없다'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전기를 고치는 일도 하고, 막노동도 해봤다고 자랑하듯 이야기했다. 그러면 나는 이 지겹고 지루한 이야기의 말들이 허공에 흩어지도록 내버려 뒀다. 분명 그 뒤엔 시골에 살면서 어릴 때 개구리를 잡았다거나, 집이 가난해서 밥보다 감자를 더 많이 먹었다는 둥의 이야기가 따라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지금 종섭은 중국집에서 일한다. 내 기억하는 한 그는 늘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으니 대략 내 나이만큼 일했을까 짐작했다. 배달 앱에도 나오지 않던 동네 조그만 가게였는데 나름 유명한 듯했다. (얼마 전, 드디어 배달 앱에 등록되었다.) 그의 형이 하는 가게인데, 형이 가게에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은 종섭이었다. 어릴 때 이 사실을 아는 내 친구들은 그럼 매일 짜장면을 먹냐고 물어보며 부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종섭은 타인에겐 좋은 사람이었지만 좋은 남편도, 좋은 아빠도 아니었다. 당구장을 차렸다가 망하고, 돈을 빌려줬다가 받지 못했다. 거의 매일 술을 마셨고, 자식들과는 데면데면했다. 배우자인 원경과 자주 싸웠다. 나와 내 동생은 원경 혼자 키웠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덕에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만 찾았고, 원경은 이런 우리가 버거웠다. 아빠와의 애착 관계가 형성되지 않아서였다. 원경은 이에 대해 마치 어제 일처럼 나에게 생생히 설명해 주고는 했다. 어렸던 나는 듣기 힘들었지만 내가 그만하라 하면 원경이 슬퍼할 것만 같아 얌전히 듣고만 있었다. 장녀의 역할을 요구받기 싫어하는 나는 누구보다 K-장녀였다.


또 그는 “먹는 것이 남는 것이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다른 곳엔 다 아껴도 먹는 것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여보세요” 하면 가장 먼저 들리는 말은 “밥은 먹었나?”였고, 집에 내려가면 보자마자 하는 말은 “뭐 먹고 싶은 거 없나.”였다. 밥을 안 먹었다고 하면, “항상 밥을 잘 챙겨 먹어야 돼.”라고 거듭 강조했다. 난 종섭에게만큼은 밥을 잘 챙겨 먹는다고 말해야 했다. 그리고 퉁명스럽게 “아빠나 잘 챙겨 먹어” 하고 나무랐다. 그 말이 사랑의 또 다른 말인 줄은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오랜 시간 종섭이 원망스러웠다. 왜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왜 어릴 때 우리와 잘 놀아주지 않았는지, 왜 자꾸 술을 마시는지. 왜 잊을만하면 사고가 나서 가족들을 놀라게 하는지. 자기는 아프면서 왜 우리는 감기도 걸리지 말라고 하는지. 왜 항상 자기는 괜찮다는 말만 하고, 왜, 도대체 왜. 그를 떠올릴 때마다 떠오르는 건 죄다 물음표뿐이었고 마침표는 없었다. 원망을 덜어내기까지는 내게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린 시절 나는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아파트에서 살았고, 예쁜 옷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맛있는 건 너무 먹어서 탈이었다. 친구들을 불러 생일 파티도 열었다. 비록 반장 선거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마 종섭의 고단한 세월과 맞바꾼 것이었겠지. 그를 좀먹은 세월들.


어느 추석 즈음, 밤늦게 종섭과 둘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그와 의식적으로 대화를 많이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으로 내가 그를 원망했던 지난 시간들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난 좋은 직업도 없고 돈도 없어서 줄 수 있는 것은 고작 내 목소리와 이야기뿐이었다. 설령 허공에 흩어질지언정 계속 내뱉어야만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술에 얼큰하게 취한 종섭은 배시시- 웃다가 별안간 한숨을 푹 쉬었다. 일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또 사람들도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물 하나가 이불 위로 툭, 떨어졌다. 마치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난 놀라지 않은 척하려 웃으며 종섭을 놀렸다. '뭐야, 아빠 울어?' 십 년도 더 지난, 종섭의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이후 두 번째로 보는 그의 눈물이었다.


“미안하다.”


종섭은, 아니 아빠는 나에게 뜬금없이 미안하다고 했다. 어린 시절 가난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공부를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문득 아빠가 중학교를 다니다 그만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게 번 돈은 다 그의 형 학비로 쓰였다. 공부를 해보지 못한 게 못내 후회된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그렇게 내게 대학을 가라고 한 걸까. 또 어릴 때 잘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랑 자주 싸워서 미안하다고 했다. 술을 자꾸 마셔서 미안하다고 했다. 돈을 많이 못 벌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잠자코 듣다가 '됐어, 괜찮아'라고만 답했다. 정말 괜찮았다. 다 지나간 일이었다. 난 그럼 앞으로 더 잘하면 된다고 농담을 던졌다. 눈물을 참느라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어느새 환갑이 넘은 아빠는 여전히 고지식하고 고집불통이다. 정치 이야기를 하다 싸우고, 공무원이 될 생각 없냐는 말에 나는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릴 때도 있다. MBTI 이야기에 열변을 토하며 이야기하는 나와 동생을 보며 도대체 그게 뭐냐고 물어보고는 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는 '나는 계획적이야.'라고 말하던 아빠. 자신에게 불리한 말이 나오면 영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대답이 실소를 터트리게 할 때도 있었다. 우린 장난스레 아빠를 '꼰대'라고 놀렸고, 아빠는 우리를 '요즘 애들'이라며 놀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많은 아빠지만, 내가 늘 아빠를 걱정하는 건 사랑이겠지. 아빠가 나를 늘 걱정하듯이.


 아빠는 타지에서 혼자 지내는 나를 늘 걱정했다. 밥은 잘 먹는지, 춥진 않은지 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했다. 나는 아빠 얘기가 지겨운데, 아빠는 나의 매일 똑같고 심드렁한 대답이 지겹지도 않은 듯했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 날 밤이면 차비는 있나-하면서 기차를 서울까지 오만 원짜리 두 장을 내 손에 쥐여줬다. 엄마가 버릇 나빠진다고 잔소리하면 엄마가 잘 때 몰래 내 방에 와서 돈을 주고 갔다. 늘 반듯하게 한번 접힌 돈을 주는 아빠. 해진 옷을 입은 아빠. 매주 복권을 사는 아빠. 어린 시절, 내가 창피해할까 친구들과 있는 나를 보면 모른척하던 아빠. 키가 작은 아빠. 웃는 게 예쁜 아빠. 일이 너무 힘들어도 가족을 생각하면 버틸 수 있다는 아빠.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진 아빠의 눈물은 내 것보다 훨씬 무거움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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