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들어요’만 10,860회
트위터를 한지는 7년이 넘었다. 트윗을 올리는 일은 드물고 리트윗을 하거나 ‘마음의 들어요’를 주로 누른다. 트위터 글은 다른 SNS 글보다 위트 있고 솔직하다. 직설적이기도 하고 기발하다. 좋은 취향의 추천, 알짜배기 레시피도 많다. 많은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웃긴 부분을 캐치하는 능력자들도 꽤 본 것 같다. 특정 여론이 어떤 허점을 갖고 있는지 집어내기도 한다. 길게 아니고 짧게, 핵심만. 트위터 타임라인을 죽죽 올리다 보면 와 세상에는 재밌고 똑똑한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 싶다.
얼마 전에 보고 기억에 남았던 트윗 내용이다. 유퀴즈 뇌과학자 편에서 나왔다는데 원래 사람이라는 동물 특성상 나보다 남을 더 사랑하고 희생할 수가 없는 종족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의 뇌를 연구했더니 ‘자기’의 개념을 확장시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과 자기를 한 몸으로 생각하는 거라고. 이 트윗은 3만이 넘게 리트윗 되었다. 어떤 분은 해당 트윗을 리트윗 해서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서』 일부를 발췌해 올렸다. 이 글귀를 알게 되어 좋았다. 이것 또한 내가 트위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누군가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이미지를 사랑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상, 즉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자기’의 확장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계속 인상에 남았다. 간섭을 싫어하는 내가 스스로 놀랄 만큼 자꾸 간섭하게 되는 우리 애인도 생각났고 부모가 아이에게 갖는 감정이 그런 건가도 싶었다. 내가 자꾸 간섭해서 우리 애인이 자기를 무슨 애 대하듯 한다고 한 적이 있는데 아니라고 하면서도 나 스스로도 헷갈렸다. 혹시?.. 그럴 리 없겠지만 진짜 그런 건가 싶어 정말 싫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 애인을 애로 생각해서 말한 게 아니었다. 그 둘은 비슷한 마음에서 비롯된 거지만 확연히 다른 거였다. 이것이 확실해져서 좋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거라니. 그러게, 맞는 말도 같다.
영화나 넷플릭스 시리즈의 좋은 대사를 캡처한 트윗, 누군가의 말을 인용해놓은 트윗도 좋아한다. 최근 내가 리트윗 한 것 중 하나는 넷플릭스 시리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 나온 “개인위생 불량은 우울증의 징조야”라는 대사가 나오는 장면을 캡쳐한 트윗이다. 누군가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명언을 올렸다. “슬퍼하는 것은 애정이 깊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언제나 지혜가 부족하다는 증거이다.” 이 말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가끔 지혜가 부족하다. 가끔이 아니라 언제나 인가?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트윗은 동물과 관련된 것이다. 기린 무릎을 물려고 입을 한껏 벌린 펠리컨(그렇지만 기린 털 하나 못 뽑을 것 같은 모양새), 눈에 묻은 모래 닦는 게(자동차 와이퍼 저리 가라다), 아침 햇살 쬐며 풀 뜯어먹는 쿼카(나는 아침 햇살을 얼마나 낭비하고 살아왔나), 뿔에 덩굴이 잔뜩 감긴 사슴(신이세요?), 친해진 다이버가 바다로 올라가려고 하니까 껴안고 안 놔주는 바다 댕댕이 물개(나도 안아줬으면), 창문 열었다 눈 마주친 옆집 고양이(존댓말로 인사해야 될 것 같은 표정), 오리를 너무 좋아해서 등 물고 데려온 강아지(둘 다 귀엽다), 엄청 커다래가지고 꾹꾹이 하는 마눌고양이(얼굴은 무섭지만 귀엽다), 말랑거리는 부리를 가진 오리너구리(딱딱해 보이지만 말랑거리는 그 부리.. 모른 척해주고 싶다) 등. 동물은 언제나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