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몰되지 않는 법
작년에 참가했던 한 워크숍에서는 프로그램 중간중간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바꿔 앉게 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어디에 앉아서 어떤 시야를 확보하는지에 따라 생각도 기분도 바뀐다는 것이다. 처음에 내가 앉았던 곳은 창가를 등지고 공간 벽과 마주 보는 자리였다. 한 발자국 멀리서 프로그램을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다음으로는 수업자료가 붙은 칠판이 보이는 공간 한가운데였다. 워크숍 진행자, 다른 참가자와 눈이 많이 마주쳤다. 다음은 창 밖이 보이는 곳. 이 동네엔 뭐가 있구나 하는 정보 값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과연, 같은 공간에서 같은 워크숍을 듣고 있는데도 무엇이 눈앞에 펼쳐지냐에 따라 느낌이 조금씩 달랐다. 진행자는 일상에서도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고 느낄 때나 화가 났을 때 잠시 자리를 옮기거나 창밖 멀리로 눈길을 돌려보라고 말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없는 날, 나는 몇 시간이고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드라마 정주행을 하거나 영화 몇 편을 연속으로 보곤 한다. 스마트폰 화면만 보느라 천장조차 눈에 안 들어온다. 그 작은 화면에 내가 들어가 버린 것인지 몸이 유난히 무겁고 다 귀찮다. 문득 불안해져서 여기서 벗어나야겠단 생각이 들지만 쉽지 않다. 그럴 땐 괜히 내 식물들 잘 있나? 오늘 물 안 주면 시들어버리는 것 아닌가? 하면서 위기감을 조금 부풀려 몸을 일으켜 식물 쪽으로 간다. 틀림없이 식물은 조금씩 바뀌어 있다. 누구는 잎이 새로 나왔고 누구는 통통한 뿌리가 튀어나왔고 누구는 잎이 시들었고, 누구는 새로운 잎이 나와 있다. 내가 해줄 일이 생긴다. 그것에 집중하며 몸을 움직이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식물들 옆에 책상이 있다. 책상에 앉으면 달력이 보이고 이번 달, 올해 할 일 리스트가 펼쳐진다. 추가된 일정을 달력에 추가한다. 계획을 정비하고 머릿속으로 할 일을 정리한다. 뇌에 활기가 도는 기분이다.
이것을 조금 확장된 예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기업 본사나 공공기관 앞에 있는 농성천막에 관한 경험이다. 도시 한복판의 넓고 깨끗한 도로 옆에 대자보, 현수막이 잔뜩 붙은 파란색 천막 말이다. 비행기도 지나갈 법한 넓은 아스팔트 도로, 번쩍번쩍한 고층빌딩으로 가득 찬 도시 풍경에 균열을 내는 어딘가 무겁고 결연한 덩어리. 요구하는, 촉구하라는, 반대한다는, 규탄하라는 현수막들. 크게 공감된다기보다는 잘 해결되면 좋겠다 정도의 마음이 든다. 멀리서 보았기 때문이다.
최근 새만금 신공항 예정부지인 수라 갯벌에 다녀왔다. 수라 갯벌은 아직 살아있었다. 내 눈으로 보았다. 새만금 신공항 건설은 추진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업은 추진 중이다. 정치인들, 토건 사업 이해당사자들은 권력과 큰돈을 얻게 되겠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닌데 싶었다. 무얼 할까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도시 한복판의 파란색 덩어리로 들어갔다. 활동가분들이 천막 지킴이 당번을 구하고 계시길래 냅다 신청해버렸다. 그거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천막 안은 생활공간에 가까웠다. 천막 안에는 활동가들이 간단히 배를 채울 간식, 컵라면, 물주전자, 일반쓰레기 봉지와 재활용 쓰레기 봉지, 문구류, 간이 전등, 이불, 좌식 책상, 피켓 등이 자리 자리에서 정갈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나의 뜻으로 모인 다른 사람들이 함께 가기 위해 규칙을 만들고 나름의 시스템을 꾸려놓았다. 천장엔 가로수 그림자가 비쳤다. 아름다웠다.
어떤 상황, 사물을 밖과 안 모두에서 경험해보니 그것이 전부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삶이 더 커졌다.
가끔 감정에 치여서 당황한 나머지 수습한답시고 뭐라도 해버리는 나는 금방 실수한 것을 깨닫고 더 큰 감정에 받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괴로워하는 일이 잦은데, 시야를 바꿔서 생각을 전환하는 경험(혹은 훈련?)은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도록 도움을 줄 것 같다.
어떤 상황, 사물에 한정적인 시선을 갖지 않도록 몸을 움직여 멀리서 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도 살펴본다면 내가 내릴 어떤 판단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닌 나보다 더 큰 우리들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