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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영 May 05. 2022

마흔이 왔다

오늘은 나의 마흔번째 생일. 우리는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면 사뭇 특별한 감성을 갖는다. 그리고 기념비적인 이벤트를 꿈꾼다. 십대에 들어섰을 때 나는 처음으로 열쇠달린 비밀 일기장을 사서 지극히 사적이고도 은밀한 나만의 세계를 지었고 스무살에는 나이트클럽에 입성하여 일탈을 맛보았다. 서른이 될 무렵에는 나 홀로 떠나는 여행에 심취하였는데 낯선 여행지에서 고독을 아그작 아그작 씹어 먹고 있노라면 내가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당시 내 일기장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솔직히 사는게 재밌다. 실패보다 후회하는 걸 두려워한다. 무엇인가를 경험하는 것은 성취하는 것만큼 가치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뭐든 한번 빠지면 홀딱이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나 혼자서도 잘 논다. 소소한 일상에 숨겨진 행복에 주목한다. 쏘울이 깃든 노력에 열광한다. 순간의 진심이면 어쩌나 걱정하기보다 진심의 순간들을 만들어가는데 집중한다. 겪어야 할 일이면 겪는다. 이왕이면 온몸으로 흠뻑.


분명 삶에 대한 열정이 그 어느때보다 뿜뿜이었고 지금보다 겁이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 스물아홉과 서른 사이, 나는 꽤나 비장하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십년 후 마흔에는 기필코 다른 삶을 살겠다고. 인생에 한 획을 그을만한 드라마틱한 로맨스를 하여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예쁜 가정을 이루고 커리어를 탄탄히 쌓아서 일과 사랑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겠다고 말이다. 그때쯤이면 뭔가 안정적이고 원하는 궤도에 진입해 있을꺼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인생대역전을 하겠다며 그렇게 벼르고 벼르던 마흔번째 생일. 큰 포부에 비하면 나는 실로 소박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여전히 싱글이고 달달한 연애조차 하고 있지 않다. 커리어는 서른 중반에 산산조각 났다가 겨우 수습했고. 이제 갓 입직했으니 사회생활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셈이다.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에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고 어느때처럼 출근을 해서 온종일 일한게 전부. 서른에 마음먹은 일들은 어떠한 것도 실현시키지 못했다. 심지어 오십대를 위한 신박한 계획도 없다. 


그런데 어쩐일인지 나는 초라해지지 않는다. 지난 십년동안 도대체 무엇을 한 거냐며 스스로를 추궁하지도 않을 것이다. 마흔, 나는 뜻밖의 행복을 만났기 때문이다. 쇼윈도에 걸린 화려한 원피스를 오매불망 욕망하며 돈을 모았는데 막상 그것은 내 체형에 맞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내 몸에 착 감기는 옷이 있는 것처럼 내가 소화할 수 있는 행복도 따로 있었다. 계획했던 일들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계획에 없던 일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있다. 생일을 맞이해서 선물받은 꽃다발과 몇 개의 기프티콘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하다. 파이팅 외치던 패기는 사라졌지만 세상이 강요하는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꾸준히 걸어가는 법을 배운 것이다. 마침내 나는 평범하고 무탈한 나날에 감사할 수 있다. 


나도 내 인생과 친해지려면 사십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청춘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나 자신을 다룰 줄 알게 된 과정만으로도 족할 뿐이다. 그동안 참 열심히 부딪히고 부지런히 깨우치며 살았기에 지금 나는 행운보다는 행복을 찾는 사람이다. 쉽게 가난해지지 않는 나의 마음이 자랑스럽다. 


퇴근 길, 오늘의 선곡은 봄여름가을겨울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가사가 구절구절 심금을 울려 몇번이나 반복해서 듣는다. 바삐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흥이 한껏 돋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생에 대한 강렬한 애착이 올라온다. 우월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비루한 적도 없었던 나의 인생에 건배하고 싶은 밤. 달큰하게 취한 사람처럼 흥얼흥얼댄다.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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