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피해 황급히 들어간 책방이었다. 젖은 트렌치 코트를 터는데 진한 커피향이 코 끝을 스쳤다.
'아, 북 카페구나.'
그제서야 내부로 시선을 돌린다.
아늑하고 따뜻함을 연출하는 화이트 우드 인테리어. 평소 내가 꿈꾸던 공간이다. 봄날의 빗방울 소리가 스며든 잔잔한 피아노 선율도 잘 어울린다.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일부러라도 이 곳을 찾게 되리라 생각했다.
헤이즐넛 라떼 한 잔을 주문해서 무심코 리드를 열어보니 하트 모양의 라떼아트가 수줍게 숨어있다. 커피를 내어줄 때 보란 듯이 열어두지 않은 것에 새삼 놀란다. 보여주기식의 이벤트로 고객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누가 알아주든 말든 정성을 다하는 바리스타의 우직한 철학이 느껴졌다. 온갖 미사여구로 장식된 사랑의 세레나데보다 감추려고 애를 써도 들키고야 마는 오랜 짝사랑처럼 그 진정이 더 와닿는다. 기념일도 아닌데 불쑥 꽃다발을 선물받는 기분이랄까. 지나온 시간들에도 이런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데자뷰가 일어나듯 덕분에 몇몇 기억들을 몽글몽글 떠올린다.
호주에서의 크리스마스는 40도를 웃도는 폭염이다. 강렬한 태양 아래서 캐롤을 듣는 것이 낯설고 비키니에 산타모자를 쓰는 해변의 풍경이 기이하게 여겨진다면 당신은 호주에서 이방인이다. 2005년 크리스마스. 홈스테이 가족들과 골드코스트로 여행을 떠난 나는 이 어울리지 않는 이색적인 조합들을 한창 즐기고 있었다. 저녁 노을 어스름, 온종일 축제를 즐기느라 노곤해진 몸을 뉘인지 얼마나 되었을까.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앉더니 에블린과 스콧의 대화가 아득히 멀어졌다. 후두둑 후두둑 소낙비 떨어지는 소리에 선잠이 깨려는데 스콧이 이렇게 말하는거다.
쉿, 조용히 해. 소영이가 잠들었잖아.
잠결인데도 그 말이 너무 스윗해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서둘러 테라스를 닫고는 가만히 다가와 선풍기를 내 쪽으로 돌려주었던 다정한 손길.
'우리가 가족이 되었구나..'
속으로 눈물이 찌르르 흘렀다. 나를 의식하지 않은 가운데. 아니, 어쩌면 본인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을 그의 친절이 이국땅에서 허기진 나의 영혼을 채워주었다.
박제된 기억이 또 하나 있다. 첫 남사친 제이크는 나와 관심분야는 같았지만 성격이 정반대였다. 깊은 밤 어두운 골목길. 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의견차이로 인해 팽팽히 대립하고 있었다. 서로의 입장만을 재확인하며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할 때 술이 얼큰하게 취한 아저씨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등장했다. 고집스럽게 자신의 의견만을 피력하는 와중에도 행여 아저씨가 내게 해코지를 할까 자신의 몸으로 막아서던 녀석. 무방비 상태에 감동이 훅 들어왔다. 이윽고 서운한 감정이 봄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입장이 다르다는 것이 우리의 우정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너로 인해 나의 존재는 근사해졌다.
동기의 지갑 속에서 오래전 내가 쓴 쪽지를 우연히 목격할 때, 나는 정녕 사랑받는다고 실감한다. 포스트잇에 장난삼아 쓴 것을 그토록 오래 간직하고 있을 줄이야. 내 뒤태를 찍은 사진을 보내주시는 부모님으로부터 나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내가 한 점으로 사라질때까지 그렇게 나를 배웅하고 있었을 줄이야.
이 나이까지 구김살 없이 명랑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이런 장면들이 나를 지탱하고 있어서다. 설령 어렵고 힘든 시련이 닥친다해도 오래 그늘지지 않고 이내 양지로 기울 수 있다. 그들의 애정에 나 조차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의도도 없었으나 어떤 의도보다 설득력있었던 묵직한 진심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한 폭의 고운 비단이 된다. 나는야 오색비단 몸에 걸치고 오늘도 회색빛 도시를 사뿐사뿐히 걸어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