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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영 Apr 21. 2022

꽃길만 걸어요

꽃길만 걸어요


가시밭길을 걸어도

이왕이면 경쾌하게

둠칫 두둠칫

바람에 몸을 맡겨

한 걸음 한 걸음

춤을 추듯이 말야

한 번뿐인 인생

마음먹기 나름인 걸

그렇게 마음속에 

꽃 한 송이 품고 살면

어딜 가나 꽃길이지


2021년 연말, 시민공모전에 당선된 나의 자작시가 서울시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게시되었다. 압구정로데오역, 고속터미널역, 대청역, 개화산역. 이렇게 네 곳이다. 혹시나 해서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출품해본 것인데 좋은 결과가 있어서 어찌나 신나던지. 소식을 접한 지인들이 여기저기서 축전을 보내주어 기쁨이 배가 되었다. 인증샷을 찍으러 찾아간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 가는 사이에 제 자리를 지키며 그들에게 따뜻한 배경이 되어주는 나의 시를 보자니 참 기특하고 대견했다. 언젠가 이름모를 슬픔을 꾸역꾸역 삼키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군중 속에서 고독하게 서 있던 나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던 어떤 무명작가의 시처럼, 나의 시가 외로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꽃길만 걸어요>를 감상하는 분마다 빠지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꽃 한 송이 품고 살면'이란 구절이다. 독자가 처한 상황과 나름의 정서에 따라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재밌다. 그것이 묘미겠지만 굳이 시를 창작한 사람의 의중을 묻는다면 내게 '꽃 한 송이'는 신앙이다. 그렇다. 나의 시, <꽃길만 걸어요>는 내 인생의 가장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면서 몸소 체험하고 깨달은 신앙 고백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주일마다 성당을 다녔다. 숨쉬고 밥을 먹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한번도 나의 신앙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의심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얼핏 믿음이 굳건했다라고 이해하기 쉬우나 사실은 진지하게 성찰해본 적이 없었다는 거다. 다름 아닌 만사형통과 소원성취를 위해 복을 비는 기복신앙. 성당을 다닌 시간만 길었지, 초보적이고 현세적인 단계를 넘어서지를 못했다. 제대로 알고 있는 교리와 말씀도 없었고 작은 비바람에도 뿌리가 훤히 드러나보일 얕은 영성으로 근근히 버티는 셈이었다. 그러니 하는 일마다 안되고 원하던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나는 속절없이 길을 잃게 될 수 밖에.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혹독한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괴로워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던 것처럼 나 또한 그분의 자녀임을 잊지 않으셨다. 냉담의 시간에서 크고 작은 기적들을 베풀어주셨고 교회 안에서 귀한 인연들을 맺어 마침내 회심의 길로 인도하셨다. 그 기적은 내가 기대하던 모습과는 분명 달랐다. 현실이 바뀐 것은 없었으니까. 다만 현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였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렸다. 덕분에 가치의 우선순위가 바뀌었고 기도의 내용이 수정되었다. 이제는 좋은 일만 생기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대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내면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한다.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고 인간의 눈으로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결국 신이 계획하신 큰 그림에 하나의 조각이었음을 깨닫는다. 


혈기왕성한 시절에는 내 의지대로 어떻게든 관철시키려 애썼는데 이 나이가 되어보니 영성의 삶을 살고자 한다. 어쩌면 지금이 참된 신앙에 눈 뜨기 딱 좋은 계절인 것 같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기대지 않고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그 분의 가르침을 쫒으리라. 그래서 내 남은 인생은 꽃길 뿐이다.


요즘 나는 다시 새벽기상을 시작했다. 좋아하는 생활 성가를 들으며 잠을 깨우고 성경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짧은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그간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직장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쳤는데 다시금 충전되는 기분이다. 별 거 아닌거 같아도 이러한 모닝 리추얼이 하루의 질을 결정한다. 하고 안 하고가 확실한 차이가 있다. 매일 성령이 내 영혼을 충만하게 한다. 구원은 하루 아침에 짠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겨울밤 눈처럼 밤새 소리없이 내려 소복이 쌓인다. 느리지만 확실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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