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A의 안색이 어두웠다.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한참을 망설이더니 이윽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 암이래요..
평소와 다른 A를 보고 무슨일이 있나보다하며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했건만 이건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오랜 연인과 혜어졌다던가, 퇴사를 하게 되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갑작스럽게 돈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할 줄 알았다. 그러면 따뜻하고 성숙한 태도로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참이었다. 이미 이,삼십대를 거치면서 친구들과의 고민 상담에 많이 다루어본 주제들이니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암이라니..부모님 세대의 어르신들이 아니라 동년배의 입에서 그 단어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순간 복잡한 감정이 나를 덮쳤지만 가장 선명한 것은 슬픔이었다. 그렇다. 태어나는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가는 우리들의 위태로운 존재감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나는 궁극의 슬픔과 마주하게 되었다. 어찌 위로해야할지 몰라 말문이 막힌 나를 오히려 A가 다독였다.
"나도 처음엔 적응 안되었는데 이제 좀 받아들였어요. 다행히, 초기래요. 수술 받으면 괜찮을꺼에요."
그리고는 내 건강부터 챙긴다.
"선배도 이제 관리해야 해요.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운동도 하고 식단도 신경쓰구요. 아직 젊다고 여유부리지 말고 건강할 때 챙겨야 한대요. 근데 우리 마흔되니까 체력이 예전과 다르지 않아요? 난 조금씩 느끼겠더라구요."
노화(老化). 그러고보니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던 그 일이 밤도둑처럼 살금살금 내게도 찾아오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한,두가닥이던 흰머리가 이제는 주기적으로 염색을 해주어야 한다. 그뿐인가. 세끼 배불리 먹어도 제법 날씬하던 체형이었는데 칼로리 소비량이 줄어든 탓에 한 끼니만 먹어도 체중이 금새 올라간다. 나도 20대 때는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커피)였는데 요즘은 엄두를 못 내겠다. 가을겨울에 그렇게 마시다가는 밥 먹은 게 소화가 안되서 대번에 체기가 온다. 나이가 더 들면 삼복더위에도 따뜻한 차를 찾게 되는 걸까.
어쨌든, 나는 그 날 이후로 처음으로 진지하게 웰다잉(well-dying)을 위한 웰빙(well-being)을 지향하게 되었다. 몇가지 건강한 생활 습관들을 들이기로 다짐했는데 그 중의 가장 절대적이고 시급한 것이 규칙적인 운동이었다. 여기서 가장 절대적이고 시급하다고 말한 까닭을 짐작해보시라. 그말인즉슨, 나는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는 운동이 싫다. 첫째, 타고나 소질이 부족하고 둘째, 운동을 무슨 재미로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운동을 너도나도 권장하는 이 시대에 마땅히 해야할 본분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나름 애를 써보기도 했다.
첫 시도는 수영이었다. 대학시절 수영을 배우겠다며 호기롭게 시작했는데 레벨 업을 끝내 하지 못하고 물만 먹다 끝났다. 강사님은 주부들이 다수였던 시간대에 어린 학생이 들어왔다고 나에게 큰 기대를 했었다. 이해력도 빠르고 자세도 좋다며 칭찬을 받았는데 막상 발장구를 시작하니 종아리 근육이 발달한 주부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수개월 제 자리에서 맴도는 나를 지켜보던 강사님은 기초 근육을 먼저 다지고 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헬스였다. 근데 웨이트 운동이 너무 벅찬 것이다. 최저 중량을 한 세트를 하는 것도 내게는 너무 힘들었고 무엇보다 참을 수 없이 노잼이었다.
그때쯤 요가 열풍이 불었다. 누구나 그랬듯이 나도 TV에서 유명 연예인들이 우아한 동작을 하며 아름다운 몸매 선을 뽐낼 때 완전히 매료되었다. 컬러감이 돋보이는 요가복을 사며 이번에야말로 인생 운동을 찾았다며 흥분했었다. 하지만 나는 미처 몰랐다. 내가 저주받은 듯 뻣뻣한 육신의 소유자라는 것을. 낑낑대며 흉내내보았지만 전신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우스꽝스럽다못해 안쓰러웠다. 로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한 나는 결국 우울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결국 자존감은 커녕 자기비하에 빠지게 만드는 요가는 내게 몹쓸 운동이 되버렸다. 그 뒤에 등산과 마라톤에도 도전해보았지만 비슷한 이유로 흐지부지 포기하고 만다.
정녕 나에게 운동은 숨쉬기 뿐인건가? 하기는 해야 하는데 꾸준히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뭔가를 찾고 싶었다.
"춤을 춰봐요. 나는 가끔씩 생각나요. 우리가 홍대클럽에서 보냈던 뜨거운 밤들이. 하하. 선배가 그랬잖아요. 춤추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수화기 너머로 그간의 나의 근황을 듣던 A가 뜻하지 않은 영감을 주었다. 타고난 자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랬다. 그래, 좋아하는 걸 하자.
마흔의 봄은 춤바람을 타고 왔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유투브를 보면서 줌바댄스를 한다. 줌바댄스는 춤 동작을 응용한 유산소 운동이다. 리듬에 몸을 맡기다보면 한 시간이 금방이다. 운동을 하면서 시계침 돌아가는 것만 보던 내가 달라지고 있다. 땀이 잘 안 나는 체질인데도 하고나면 온 몸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혈액순환이 되는 것인지 얼음장같던 손도 따끈따끈해진다. 더군다나 한 시간에 천 칼로리가 소모된다고 하니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남들 다 하는거 나는 왜 하지 못하냐고 다그치지 않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방식을 찾겠다. 나는 이러한 변화가 무척이나 반갑다. 나만의 색깔로 나다운 행복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자기애가 마구 솟고 보다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인생 뭐 있는가. 내 멋으로 사는거지.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