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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영 Oct 31. 2022

당혹스런 진실

뭔가 잘못 들었지 싶었다. 분명히 그랬어야 했다. 뒤통수에 꽂힌 그 말이 귓가에 쟁쟁 울렸다.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가려다 말고 나는 황급히 돌아섰다. 점원과 눈이 마주치자 영문을 모르는 그녀는 내게 묻는다. 문제의 그 단어를 다시 언급하면서 그것도 목소리의 반톤을 더 올려.

뭐 더 도와드릴까요, 어머님?


악!!!!!!!!! 그것은 확인사살이었다. 어머님이라뇨? 내가 어디를 봐서 어머님인가요? 주위를 둘러봐도 내 곁에는 오해를 살만한 아이가 하나도 없는데. 그래요, 내가 아이 한두명이 있을법한 나이기는 하죠. 나름 동안이란 소리 들으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아무리 적게 잡아보아도 아이 하나쯤은 있는 나이로 보인다는 건가요? 설마 아줌마라 호칭할 것을 애써 완곡하게 돌려 부른건가요? 수만가지 따져묻고 싶은 말이 아우성치는 바람에 잠시 정신이 혼미했다.

 

"괜찮으세요?" 점원이 걱정스레 나를 바라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분명 마스크를 끼고 있었는데 어디서 엄마 티가 났을까? 눈가에 주름이 있나? 아냐, 분명 체중이 증가해서 몸태가 바뀌어서 그래. 다이어트를 해야겠어. 괜시리 거울을 자꾸 들여다보며 냉철한 자기분석과 철저한 자기반성을 했드랬다. 20대는 화장을 안하면 학생이란 불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때부터인가. 호프집에 가서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되면서 조금 서운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겪은 일은 차원이 다르다. 결혼을 하지 않고 싱글인 나에게 '어머님'이란 호칭은 너무나 당혹스러운 것.


누구에게나 '엄마'라고 처음 불리게 되는 순간의 로망이 있지 않은가.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이 아직까지도 간절하지는 않다만 나를 엄마라고 불러주는 이는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나의 사랑스런 아기여야 했다. 혹은 출산을 하고 조리원에서 '어머님'이라 불린다면 모를까. 그 뭉클한 순간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저 나이들어 보인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맞닥뜨리게 된 '어머님'에 나는 몹시 서글펐다.


그나마 다행히도 내게는 '고모'라는 호칭이 있다. 내가 생애주기별로 얻게 되었던 많은 호칭 중에 가장 감사한 이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삐뚤빼뚤하게 '고모'라고 써내려간 카드를 조카로부터 처음 받았을때의 감동은 잊을 수 없다. 단순히 기쁘다라고 표현할 수 없는 환희가 있다. 머리로 짐작하는 감정과 심장으로 직접 느끼는 감정은 다른 법. 빨간색이라고 다 같은 빨간색이 아니라 '검붉은' '와인빛' '시뻘건' 등 그 농도에 따라 다른 빛깔인 것 처럼 고모라고 처음 불리던 날의 기쁨은 몸소 체험하지 않으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나는 '엄마'라 불릴때의 오묘한 심정을 영영 모르겠구나 싶다.


어쨌든 이제 나는 남이 볼때도 영락없는 아줌마다. 곱씹어볼수록 나는 확신했다. 가게 점원이 나를 아줌마라 여겼으나 예의를 갖추어 '어머님'이라 칭했을 뿐이라고. 내 나이를 밝히지 않으면 내 연령을 가늠하기 어려울꺼라 생각했던 건 근거없는 자신감, 보기 좋은 착각이었다. 나만 알았으면 했던 비밀이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이는 숨길 수 없나보다. 감기에 걸리면 기침이 자꾸 새어나오듯이 나이도 나의 모든 면에서 묻어 나온다. 걷는 자세도 달라지고 체취도 변한다. 하물며 목소리도 바뀌니 말이다. 마음도 나이에 비례해서 철이 든다면 좋을텐데.  사춘기 소녀때나 지금이나 미련한 실수를 반복하며 후회를 일삼는다. 아름드리 나무에 새겨진 나이테처럼 주름이 늘어나는만큼 타인에게 그늘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내 나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한 살씩 나이를 먹기 때문이라지. 서른살이었다가 갑자기 마흔이 되면 뜨악하는데 야금야금 한 살씩 늘어나니 그 차이를 체감하기 어려운 것이란다. 한 해에 한 살씩 먹어서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에겐 오늘은 센세이션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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