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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영 Sep 24. 2022

죽을때까지 나는 여자

머리를 기르는 중이다. 지금 내 머리는 일명 거지존. 즉 장발과 단발 사이의 과도기로 어떤 스타일링을 해도 예쁜 모양이 나오지 않는 애매한 길이다. 하루에도 몇번씩, '확 잘라버려?' 하고 시험을 받지만 미용실에 달려가고픈 충동을 꾹 참아보기로 한다. 하긴 서른 다섯부터 무려 5년간 보브컷을 고수해왔으니 거지존을 견디는 것이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근데 숏단발을 했던 이유가 어이가 없다. 내 나이에는 더 이상 긴 머리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온다. 5년전이면 서른 다섯인데. 지금 마흔에 비하면 얼마나 어린가. 고작 서른 다섯에 나는 나의 여성성을 포기해 버렸다니. 그쯤에 즐겨 입던 미니 스커트와 하이힐도 모두 정리했던 것 같다. 물론 체중이 증가하면서 몸매에 자신이 없기 시작한 것도 한 몫은 했다. 내 친구들처럼 출산과 육아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러한 변화가 생겼다면 그나마 이해가 되는 구석이 있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 나는 과도하게 모든것을 나이탓으로 돌렸고 어떤 것에도 희망을 두지 않았다. 이래서 몸이 늙는 것보다 마음이 늙는게 무섭다. 


사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머리를 기르지 말라는 법은 없다. 또 숏커트를 하면서 나의 여성성을 포기해버렸노라 말하는 것도 논란이 된다. 혹시 나의 표현에 불편한 독자가 있다면 사과 드리고 싶다. 성차별적 발언보다는 마흔 문턱을 넘어가는 어느 중년 여성의 자조섞인 넋두리쯤으로 받아주셨으면 좋겠다. 핵심은 나이에 걸맞는 스타일이 무엇이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에 대한 나의 태도이다. 나이가 들어 숏커트를 한다해도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이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면 문제가 될 게 무엇이겠는가. 원하는 바가 마음속에 따로 있으면서 나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사는 것이 비극이다. 


이런 내가 얼마전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는 중년 여성의 천편일률적인 짧은 머리에 대해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다가 그런 스타일링을 할 수 밖에 없는 나름의 이유를 생각해보았더랬다. 네살배기 아들을 둔 친구의 경우 아이가 머리채를 자꾸 잡아 육아에 방해가 된다고 한다. 나는 나이가 들면 모발에 힘이 없어지고 푸석푸석해져서 긴 머리를 해도 생기가 없다고 덧붙였다. 똑같은 스타일을 해도 20대의 소녀소녀한 이미지는 흉내낼 수 없다고 한탄하면서. 


한참 맞장구를 치던 친구가 별안간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까 우리 더 나이들기 전에 해봐야 하는거 아니야?'

순간 깨달음이 왔다. 오늘이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라는 것을. 앞으로 쭉 미모가 퇴화할 일만 남았으니 바로 지금이 제일 예쁠때다. 오십대의 눈에는 내가 얼마나 파릇하겠는가. 칠십대의 눈에는 나는 그야말로 꽃띠 아가씨다.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다 공원 벤치에 잠깐 앉게 되었다. 매너좋은 남자 동료가 더러운 의자를 털어 주는데 오랜만에 내가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꼈는데 어쩌면 그동안 다름아닌 내 스스로가 자신을 여성이 아닌 중성쯤으로 여겼던 것은 아니었을까 반성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고 치부하며 하대하는 일은 없어야 겠다. 


나는 내가 여성이라 참 좋다. 여자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우아한 곡선을 사랑한다. 어떠한 체형의 여성이라도 여성이라면 누구나 향유하고 있는 아우라. 그 관능적인 체취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 누가 보아주든 상관하지 않고 언제나 곱게 단장해야지. 파파 할머니가 되어서도 아니 죽을때까지 나는 여자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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