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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영 Aug 15. 2022

나이만큼 그리움이 온다

강남역 한복판.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 너가 서 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다. 그런데 뜨거운 태양 아래 더운 입김을 내쉬며 손부채를 연신 부처대는 것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더위를 못 견디는 건 여전하구나 싶었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 전에 버스가 먼저 도착해서 너를 앗아갈까봐 발을 동동 굴린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너인데 내 눈앞에서 놓친다면 두고두고 아쉬울 거 같았다. 용기내어 이름을 크게 부르고 싶지만 목이 메어서 소리를 낼 수 없다.


'가지마, 가지마..' 마음속에 맴도는 혼잣말. 초록불이 들어오자 허겁지겁 뛰기 시작한다. 일제히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틈에서 너에게 닿으려고 나는 온갖 힘을 쏟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조금씩 더 선명해진다. 15년의 세월속에 나는 이렇게 변했는데 너는 그대로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와 한 쪽 어깨에 단정하게 걸친 빈티지 가방까지. 너에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 버스가 나를 앞질렀다. "윤미야!" 다급하게 이름을 부르자 너가 버스에 올라타다 말고 뒤돌아본다. 상기된 붉은 뺨에 사랑스러운 주근깨. 정말 윤미다. 그 찰나, 버스 문이 닫혀 버렸다. "안돼!"


꿈이다. 꿈뻑꿈뻑 눈동자를 감았다 떴다.이내 묵직한 여운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감싼다. 새벽녘 덩그러니 나 홀로 깨어 한동한 먹먹한 가슴을 달래느라 애를 먹는다. 이따끔씩 꿈에서 윤미를 볼 때마다 온종일 눈 앞에 아른거린다. 지금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윤미와 나는 산소학번 대학동기다.

20020338 지소영 20020339 지윤미.

가나다 이름 순으로 학번이 정해져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붙어다니게 되었다. 재잘재잘 수다스러운 나와 달리 윤미는 말수가 적었다. 내가 우스운 소리를 해대도 박장대소하는 법이 없이 빙그레 웃는게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윤미가 미소를 크게 지으면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 마냥 좋았다. 윤미는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줄곧 병행하면서도 한번도 지각한 적 없이 성실했고 필기는 늘 단정했다. 그래서 시험볼때마다 윤미의 잘 정돈된 노트가  나를 구원하곤 했다. 딸만 넷 있는 집 장녀라 어딘지 모르게 믿음직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자유와 일탈을 갈망하던 시기에 정해진 길에서 좀처럼 벗어날 줄 모르는 그녀는 나에게 다소 심심한 존재였다. 집, 학교, 알바만 점 찍는 일상이 답답해 보였다. 그림자처럼 내 곁을 지키는 윤미를 두고 내 마음은 항상 다른 곳을 달려갔다. 나는 인기가 많고 다양한 경험으로 일상을 수놓는 친구들을 동경했고 그들과 친해지기를 원했다. 소위 말하는 인싸 대열에 합류하고 싶었던 것이다. 더욱이 대학 4학년에 호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후 나의 세계관에 지각변동이 일어나자 윤미는 그야말로 아웃오브안중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국물 좀 먹었다고 뭐라도 된 줄 알고 한껏 우쭐해있던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


우리는 결코 싸운 적이 없었으나 함께 했던 4년이 무색하리만치 졸업 후 연락이 뚝 끊겼다. 사회초년생으로서 자리잡느라 바빴다는 것은 핑계다. 당시에 내가 지향하는 가치와 윤미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기에 굳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로 아쉬울 것 없는 인연이라 생각했는데 삶의 굽이굽이마다 애틋하게 떠오르는 벗이 윤미라니. 열정이라 포장했지만 사실은 욕망으로 가득찼던 청춘을 보내고 한때 중요하다고 여기던 가치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평범함의 가치를 마침내 재발견했을 때 무의식 저편에서 윤미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올라왔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땠을까. 한번 뿐인 인생에서 '만약에..'라는 말을 꺼내어 회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오늘처럼 꿈속에서 윤미를 본 날이면 속절없이 그녀와의 추억을 곱씹느라 온 우주가 들썩이고는 한다. 한결 같았던 사람이니 여전히 한결같으려나. 결혼을 해서 엄마가 되었겠지. 윤미의 천성이 공무원에 딱 맞을 거 같아 나처럼 공무원이 되지는 않았을까 상상도 해보았더랬다.

입직하자마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사시스템에 직접 검색을 해보기까지 했었는데. 우연이 운명이 되어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도란도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겠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어리고 성숙하지 못했던 기억이 많다. 때로는 당면한 삶의 과제들에 허덕이느라 마음의 여유도 없었으리라. 미처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그들에게 주었던 상처들이 떠오를때마다 슬프다. 아온 세월만큼 업보가 늘어나고 그리운 이들도 많아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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