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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영 Nov 26. 2022

모든 순간이 나였다.

현재 구청 문화체육과에서 체육시설 신고 업무를 맡아 하고 있다. 변경 신고를 하러 온 민원인이 있었는데 전산 시스템에 애당초 신고내역이 검색되지 않는거다. 신고필증 원본까지 소지하셨으니 신고를 한 것은 분명하다. 필증 발급년도가 16년 전인 2006년.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니 그때는 현 전산시스템이 개발되기 전이라 한다. 아마도 디지털 데이터로 옮기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무턱대고 전산에 등록시킬 수는 없는 터라 기록보관실에 가서 당시 신고한 내역을 찾아보기로 했다.


구청 지하서고. 오다가다 종종 지나쳤지만 직접 들어가 보는 건 처음이다. 내부는 도서관 자료 열람실처럼 생겼는데 실내가 어두워서 그런지 비밀스런 느낌이 들었다. 문서 열람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더니 서고 직원이 빽빽히 꽂혀있는 자료들 틈으로 빛바랜 파일 하나를 꺼내 주었다. 행여 훼손이라도 시킬까 염려되어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든다. 방금 전 유물을 발굴한 고고학자처럼 내적 흥분이 일었다. 다급히 들여다보려다가 귀퉁이에 묻은 손때를 보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오랜 시간을 달려온 것과 마주하면 예의를 갖추고 싶어진다. 한낱 서류 꾸러미로 대하기는 싫어 잠시 뜸을 들인다. 


숨을 고르고 차분히 파일 겉면을 넘겼을 때 월별로 반듯하게 정리된 신고현황표가 있었다. 2022년에서 2006년으로의 시간 여행. 유독 신고건수가 여름에 몰려있는 걸 보니 더위에 현장점검 나가느라 노고가 많았을 담당 주무관들의 땀방울이 그려진다. 그 목록에는 내가 찾고 있던 분실된 기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원하던 정보는 금새 얻었으나 재미가 나서 내친김에 이것저것 두루 살펴본다. 중요한 사항을 체크한 밑줄과 메모들. 나중에라도 문제가 될 소지는 가급적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려고 애썼던 선배님들의 흔적에 정감이 느껴졌다. 내가 매일 하고 있는 일들도 먼 훗날 누군가에게 전수될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팀장님은 당시 담당자들의 이름을 보시고는 반가워하시며 회한에 젖으신다. 

" 이 친구가 이때 이 업무를 했었네. 민원처리 하느라 꽤나 고생했겠구만. 허허..가만있어 보자. 이맘때쯤엔 난 어느 부서에 있었더라....옛날에 우리 참 열심히 일했어. 재밌는 일도 많았지. 세월이 빨라."

몇 해뒤면 퇴직하실 예정이라 더욱 감정이입이 되시는 모양이었다. 과거의 본인과 마주하는 기분이셨을꺼다.


이따끔 우리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시간을 초월해 대화를 하는 상상을 해본다. 아니, 난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2014년 10월. 전주여행을 하다 느린우체통에 '나에게 부치는 엽서'를 넣었었다. 안내판에는 6개월 내지 1년 후에 배달될 꺼라 쓰여 있었기에 철썩같이 믿고 한동안은 설레며 기다렸다. 근데 깜깜무소식이 아닌가. 뻘짓을 했구나 싶어 기억 저 편에 묻었는데. 툭하고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듯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던 2016년 6월. 별안간 그 엽서가 날아왔다. 그것도 아주 드라마틱하게. 엽서 속, 과거의 나는 이렇게 말했다. 

'미래의 나야. 무엇보다 행복하기를 바래. 어떠한 일이 생기더라도 걱정하지 마렴. 결국 모든게 다 잘될꺼야. 신이 항상 나를 축복하거든. 잊지마. 인생은 수천개의 작은 일련의 기적들로 이루어져 있어. 운명이 나를 부르고 있단다. 행운을 빌어.'


한줄 한줄 읽어내리다 폭포같은 눈물을 쏟았다.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지만 과거의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미래의 내가 겪게 될 고난을. 그리고 어떻게든 알리고 싶어했다.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를 얼마나 열렬히 응원하고 있는지를. 삶이 녹녹치 않을때마다 시간의 선상에 나를 두고 과거와 미래의 나에게 자유로이 말을 건다. 


지금은 땅이 꺼질듯이 한숨을 쉬어도 일년 뒤에 돌아보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일들이 있고 일년 뒤에 닥칠 시련을 미리 안다해도 지금의 선택이 최선인 경우도 있다. 어릴때는 조금 더 잘해볼 수는 없었을까하며 스스로를 못살게 굴었는데 이제는 이해한다. 과거의 나도 옳고 현재의 나도 옳다는 것을. 이십때에 내가 했던 치기어린 행동들은 딱 이십대였기에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마흔의 내가 하는 모든 고민들은 오직 사십대라서 어울린다. 인생의 매순간마다 내가 구했던 답들은 모두 의미가 있다. 


올해를 마무리하는 의식으로 내년의 나에게 편지를 썼다. 명동 우표 박물관에 느린 우체통이 있다고 하니 조만간 들려야지. 편지를 받게 될 2023년 연말에는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어쩌면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읽어보면서 혼자 빙그레 웃고 있을지도. 미래의 내가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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