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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영 Jun 11. 2023

어느날, 신이 내게 물었다.

여기 자갈과 모래가 있다. 빈 공간없이 자갈과 모래로 유리병을 완전히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방법은 간단하다. 입자 크기가 큰 순서대로 넣으면 된다. 덩어리가 큰 자갈부터 유리병에 담고 자갈 틈새를 모래로 메우면 된다. 언젠가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영혼의 구멍으로 찬바람이 자꾸 스며 들어와 삶의 균형을 잃게 되거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을 그 중심에 두라고 말이다. 신앙이 아닌 세속적인 것들로 그 구멍을 먼저 채워본들 그것들은 입자가 작아서 영혼을 충만시키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달력에 빼곡히 적힌 업무 일정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별안간 신부님의 말씀이 떠오른건 왜 때문이었을까.끊임없이 소모되고 있는 나에게는 충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동안 인풋은 없고 아웃풋만 반복되는 일상이었으니 나는 마음의 목소리를 따르기로 한다. 잠시 하던 일들을 멈추고 수도원에서 피정을 하며 2박3일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피정은 가톨릭 신자들이 영성 생활에 필요한 결정이나 새로운 쇄신을 위해 일상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묵상과 성찰 기도 등 종교적 수련을 하는 일이다. 불교의 템플 스테이와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새벽 5시. 수도원의 종소리가 잠들어있던 내 영혼을 깨웠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6.25전쟁 당시 남한으로 피난온 독일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세운 수도원이다. 공지영 작가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배경이기도 하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 곳. 인터넷 검색을 하다 로마네스크와 고딕을 혼용한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고 첫 눈에 반했드랬다. 전날 서울에서 내려올때는 제법 후덥지끈했는데 오늘은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덕분에 성전을 향하는 길이 싱그롭다. 빗방울이 내려앉은 수도원 풍경은 무척이나 영롱했다.


고요한 침묵 속에 성전 십자가를 한참 바라본다.

세실리아야, 너 행복하느냐?


묵상중에 그 분의 따뜻한 음성이 들렸다.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온 몸에 힘이 바짝 들었던 나는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다. 그리고는 깨닫는다. 영혼의 구멍으로 찬바람이 자꾸 스며들어왔던 이유를.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내게 한번도 어떤 것을 성취했는지 물어보시는 법이 없다. 그분이 궁금한건 언제나 나의 행복이다.


인생은 성취하기 위한 게 아니고 오로지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중요한 건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

자녀가 선물을 받고 기꺼워할 때 부모의 기쁨이 되듯이, 신은 우리가 주어진 귀한 삶 안에서 숨어있는 행복을 부지런히 누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신다. 그러기에 내가 외롭고 고통스럽다 여기던 순간들조차 나는 결코 홀로 내버려진 적이 없었다. 이토록 나의 행복을 간절히 바라는 주님의 사랑이 나를 끝없이 구원하므로.

인생은 완성이 없다. 타인에게 인정 받고 목표를 달성하며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도 우리는 여전히 갈증을 느끼며 쉽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나 미완성의 미학을 발견하면 행복하다. 높이 올라가기 보다는 깊이를 알아가고, 행복을 행복이라고 알아채릴 수 있을 때 삶은 본질에 가까워진다.


오늘의 행복은 오늘 누리는 것이 옳다. 오늘의 행복을 자꾸 미루다보면 행복이 무엇인조차 잊게 된다. 그분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영혼의 묵은 때를 씻겨내니, 비로소 나는 오늘의 행복을 맛본다. 나를 감싸는 그레고리안 성가와 아름다운 오르간 소리에 은총이 가득했다. 주님, 찬미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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