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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영 Sep 04. 2023

초록이와 연두

아차!

퇴근시간 사무실을 나서려다 말고 몸을 돌린다. 초록이와 연두를 잊을 뻔 했다.


나의 오피스 반려식물 '초록이와 연두'

인사발령으로 부서이동을 하게 되자 예전 동료들이 보내 준 녀석들이다. 초록이는 통통한 잎마다 좌르르 윤이 나는 금전수로 물끄러미 바라만 보아도 나에게 생기를 준다. 연두는 시원하게 쭉 뻗은 줄기와 넓은 이파리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여인초인데 플랜테리어용으로 인기가 많은 만큼 첫 눈에 나를 심쿵하게 했다. 물 주는 날을 달력에 꼭꼭 표시해두는데도 바쁜 업무탓에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니. 말도 못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갈증이 날까? 챙겼던 가방을 내려놓고 손을 걷어 올린다.


쑥쑥이와 뚝심이에게 상처를 주었던 과거가 떠올랐다. '너도나도 식집사' 열풍이 불 때 호기롭게 들여놓았다가 차일피일 그들을 방치했었다. 결국 나의 무지와 게으름이 귀한 생명에게 위해가 되었다. 나와 달리 뼛 속까지 식집사였던 아빠는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게 된 둘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고 어느새 쑥쑥이와 뚝심이는 어엿한 아빠의 아이들로 자라고 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아빠는 정말 타고났다. 십년 전, 대퇴부 수술을 받고 입원하셨을 때다. 병원에 누워있는 아빠를 보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아빠가 할 얘기가 있다고 하시길래 뭔가 부녀간의 정이 돈독해지는 말씀을 하실 줄 알았더니 집에 있는 화초들 사진을 찍어오라는 거다. 사진을 보면서 하나씩 물주는 방법을 알려주시겠다는 것이다. 병상에서도 본인의 부재중에 시들어갈 화초들을 먼저 걱정하시다니. 뭐든지 시작하면 꾸준하고 성실하게 임하시는 아빠는 화초를 가꿀때도 기복이 없다. 이 정도여야 진정한 식집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손길로 나 보란듯이 잘 살게 된 쑥쑥이와 뚝심이를 보면 무책임했던 내 자신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 부끄럽다. 때 맞추어 물을 주고 틈틈이 햇빛을 쬐어주는 것.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 내게는 여간 마음 쓰이는 일이 아니다. 그러고보면 난 지극히 이기적인 개인인가 보다. 결혼하고 엄마가 되었다면 조금은 달랐으려나. 나 아닌 남을 돌보는 능력은 타고 태어나는 걸까. 아님 하다보니 잘 하게 되는걸까. 반짝 사랑을 주고 말거면 다시는 키우지 말자고 다짐을 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초록이와 연두가 내 일상으로 들이닥쳤다.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나를 보며 싱그롭게 웃음짓는 이 둘에게 이내 마음을 뺏긴다. 새로운 환경에 마음 둘 곳이 없어 외로웠는데 사무실 한 구석에서 나를 응원하는 초록이와 연두가 있어 힘이 났다. 낯선 곳에서 '이 녀석들이 버티고 있는 구역만큼은 내 영역이야'라는 부심이 생기기도 하고.


말로는 '이번에는 듬직한 식집사로 거듭나야지'하지만 초록이와 연두가 영 어색하고 서툰 손길을 모를리가 없다. 그럼에도 말없이 나를 기다려주는 이들이다. 전적으로 나에게 기대는 작은 생명들. 내가 무엇인가를 돌보려면 더 부지런해져야 겠다. 내 안에 갇혀 잡념들로 가득차 있으면 안되는구나 싶다. 일상이 흐트러지고 무너지는 일 없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그렇게 너희들을 가꾸는 일이 나를 가꾸는 일임을 깨닫는다. 비좁기만 한 나의 세상에도 사랑이 움튼다. 이 나이에서야 걸음마처럼 사랑을 배우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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