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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영 Sep 19. 2023

금쪽 처방

인생은 현재 진행형이다. 한 고개를 넘어왔다 싶으면 다른 문제가 생기고 이제 다 깨달았다 했던 것들이 또 다시 뿌리째 흔들린다. 똑같은 자리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이유로 넘어져서 엉엉 울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천지에 이런 바보가 또 있을까 싶다. '뭘 잘했다고 울어?'라고 소리를 빽 지르려다가도 못내 자기연민에 휩싸여서 부둥켜 끌어안고 만다.


내가 번번이 넘어지게 되는 지점은 '피부 트러블'이다. 한동안 괜찮았던 피부가 작년 여름부터 다시 말썽이다.기승을 부리다 곧 잦아들겠지 했는데 지금껏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고 있다. 덩달아 내 기분도 오르락 내리락 기복이 심해졌다. 브런치에 올린 지난 글 속에서 나는 피부 콤플렉스를 극복한 자존감있는 어른이었는데 현실은 아직 방황하는 어린아이. 결국 우리는 순간을 담아내어 글을 쓸 수 있을 뿐이다. 하여, 우리가 매일 글을 쓰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삶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끊임없이 메우는 것. 나는 자존감 회복을 위해 서울시 청년 마음건강 지원사업에 참가신청서를 냈다. 법적 나이로 만 39세까지 지원이 가능하다하니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다.


여러 번의 사전검사를 하고 상담사를 배정받았다. 검사결과에 따라 총 상담회차가 결정되는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4회차. 기필코 이번 기회에 멘탈갑으로 거듭나리라 다짐하며 나는 비장하게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문제성 피부가 깨끗이 낫기를 꿈꿔왔지만 그만큼 긴 시간동안 실망을 거듭했습니다. 이제는 그런 드라마틱한 일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외적인 조건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싶어요. 높은 자존감 말이에요"


선생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상담을 신청하는 많은 분들이 소영님과 같아요. 자신의 문제가 낮은 자존감 때문이라 생각하죠. 근데 우리가 호주머니 속에 뭘 넣어 두었는지 종종 잊어버릴 때가 있지만 건망증을 치매라고 하지는 않아요. 자존감이라는 것도 내면 어디에 간직해두었는지 잊을 수 있어요. 항상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는건 불가능하죠. 설사 그게 가능하다하더라도 그건 또 다른 문제일 수 있어요. 높은 자존감은 강한 자존심으로 변질되기 쉬우니까요. 오히려 소영씨가 '나는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서는 안돼'라고 스스로를 엄격하게 몰아세우는건 아닌지요? 자존감보다는 저는 소영씨와 그 이야기를 먼저 해보고 싶군요."


허를 찔렀다. 어떠한 심리적 장애에도 한번도 넘어지지 않길 바라다니. 그것은 차라리 오만이었다. 나는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삶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끊임없이 메우는 일이라고. 우리는 언제나 과정중에 있으며 핵심은 크게 다치지 않게 잘 넘어지고 넘어질때마다 툭툭 털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살면서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이 내게 일어날 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한탄하거나 혹은 ' 내가 저지른 무수한 죄 때문에 벌 받는 걸꺼야'라고 자책하기 쉽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일들은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들이다. 나에게만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란 없다. 우주안에서 명료한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이는 자연에 일부인 인간의 삶에도 투영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문제 없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마음도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만큼 오만하다. 그 밑바닥에는 '무엇이든 내 뜻대로 이루고 말겠다'는 인위, '나만은 다른 유기체와 달라야 한다'는 교만이 숨어있다.


정신의학자 카를 융은 말했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라고.  나는 자연의 일부다. 불완전함이 만들어내는 완전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나는 내 존재 자체로서 경이로워진다. 또한 우리 삶에 나타나는 무수한 모순들을 사랑할 수 있다.


오늘 나는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자존감을 꺼냈다. 금쪽 처방을 받고 다시금 일어선 나 자신에게 따뜻한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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