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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kii Feb 16. 2021

촬영장 밖을 달리다

하루에 30분 달리기 수업

어렸을 적부터 난 뛰는 걸 싫어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옆구리가 아프고, 목에서 느껴지는 쇠맛이 싫었다.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하는 술래잡기나 숨바꼭질 등에서는 항상 가장 먼저 붙잡히거나 자진 납세해 미리 붙잡히는 깍두기 역할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체육 시간 50m 달리기는 물론, 학년마다 실시하는 체력장 오래 달리기도 항상 걸어서 꼴찌로 통과하는 그런 점잖은(?) 학생이었다.


그때는 학교를 졸업하면 내 인생에서 체육 시간과 함께 달리기가 아예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일을 하며 달리게 될 줄은.


처음 한 교양 프로그램에서 방송작가 일을 시작할 때 선배들은 입버릇처럼 항상 "작가는 엉덩이 무거운 사람이 이기는 거야"라고 말했다. 그랬는데, 그래서 작가는 사무실에 주구장창 버티고 앉아 섭외 전화와 씨름하고 끝없는 아이템 서치에만 열중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조금 더 버라이어티 했던 쇼양 프로그램을 거쳐, 더 빡세게(!) 진행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일하게 된 나는 매주 달릴 수밖에 없었다. 소품, 바로 그놈의 소품 때문!


그놈의 소품은 왜 촬영이 임박해져서야 겨우겨우 확정이 되는 건지? 촬영 전 조연출과 함께 더블체크했을 땐 박스에 잘 담겨 있던 것이, 왜 녹화장에만 가면 없어지는 건지? 왜 2주간의 열렬한 회의 끝에 정한 게임은 촬영장만 가면 룰이 바뀌고 소품이 추가되는지? 나는 항상 녹화에 앞서 근처의 문구사나 대형 마트를 서치 해둔 후 소품 주문이 들어오면 요이땅, 달리기를 시작해야 했다.


내가 그다지도 사랑해 '하지' 않았던 그 불쾌한 느낌. 기억 속 목구멍을 타고 비릿한 쇠맛이 올라오다 못해 토기가 밀려와도 멈출 수는 없었다. 왜? 내가 늦으면 촬영이 엉망이 되니까. 나는 때로는 전지 종이를, 때로는 장난감 말을 찾아 근처의 가게들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리고 n년이 지나 막내작가를 벗어난 지금도 나는 촬영장에서 달리기를 멈출 수 없다. 담배 피우러 간 출연자를 스튜디오로 데리고 와야 해서, 숨겨둔 깜짝 게스트에게 등장 사인을 줘야 해서, 바쁜 막내를 대신해 출연자에게 줄 커피를 사러 가야 해서... 아, 그런 날은 정말이지 텀블러에 맥주라도 담아 콸콸 들이키고 싶다.


그런 내가 자발적인 달리기를 시작했으니 바로 이름하야 '런데이'. 요즘 내 동년배들 사이에서 인기인 달리기 트레이닝 어플인데, 하루에 30분씩 달리는 시간과 강도를 높이며 8주 뒤에는 30분간 쉬지 않고 달리게 해 준다나 뭐라나. 친구가 시작해서 엉겁결에 시작한 '런데이'는 요즘 내 새로운 취미가 됐다.


사실 러닝을 시작한 건 작년부터긴 했다. 작년 브런치 기고를 시작했던 바로 그 백수 시즌에, 감기처럼 찾아온 마음의 병을 달래기 위해 무작정 집 근처 체육공원을 방문해 걷다가 '에라 모르겠다'의 심정으로 운동장 트랙 반 바퀴를 뛰었는데, '어라?' 기분이 좋은 거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목에서 쇠맛이 느껴지는데 불쾌한 느낌이 아니라 굉장히 뭐랄까... 웃겼다. 오글거리게 말하자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발이 뜨거워지는데 왠지 기분이 좋았다. 체력이 안 돼서 운동장 한바퀴를 오롯이 뛰지는 못했지만, 2주 정도 조금씩 달리는 거리를 늘려 나중에는 운동장 트랙 한바퀴 못 되는 거리를 뛸 수 있게 됐다.


얼마 안 가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어 내 혼 러닝은 끝이 났지만 얼마 전 나와 같이 백수 신세인 방송쟁이 친구와 대화하던 중 러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의 영업으로 나도 어플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러닝을 시작하게 됐다. (그날 운동복과 신발을 사느라 30만 원을 쓴 게 함정)


이 어플이 얼마나 똑똑하냐면 러너끼리 친구를 맺게 하고, 친구가 운동을 시작하면 알림을 주고 서로 응원을 하는 버튼을 만들어뒀다. 서로가 서로의 감시자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또 운동이 마친 후에는 내가 얼마의 시간 동안 얼마의 속도로 얼마나 뛰었는지를 SNS나 커뮤니티에 공유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게 또 굉장히 있어 보여서, 나 같은 SNS 중독자들의 과시욕을 자극한다. 그 덕분에 이틀에 한번 집 근처 체육공원을 찾아 30분간 열심히 뛰는 중이다.


ㅡ쓰고 보니 꽤나 돈 받고 기고하는 뒷 광고 같지만 전혀 아니라는 점을 밝힙니다. 하지만 돈을 주신다면 받겠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하루 30분씩 투자로, 8주 뒤에는 쉬지 않고 30분을 달리게 해 준다는 마법의 러닝 어플.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방송작가 꿈나무들은 지금부터 미리미리 이 어플을 깔고 달리기를 연습하길. 당신도 언젠가 달릴 날이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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