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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떡 Nov 25. 2021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회사 생활에서의 낙을 꼽으라면 단연 점심시간을 꼽겠다. 물론 회사에 다니는 궁극적인 목적이 월급이라 할지라도, 빈도 측면에서는 점심시간이 월급보다 자주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보통 11시 반에서 12시 사이에 점심을 먹는다. 아침을 든든히 먹은 날이라도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견딜 수 없는 허기가 몰려온다.  


오늘의 구내식당 메뉴는 잡곡밥, 콩나물국, 간장 불고기, 두부구이, 배추김치다. 메뉴가 참 건강하고 소박해 보인다. 아쉽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대신 고기반찬인 불고기를 식판에 수북하게 담았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인지 유독 불고기 배식대에서 시간이 지체된다.


‘잘 먹겠습니다!’ 인사말 뒤에 밥을 한술 떠 입안에 넣었다. 나는 윤기가 흐르는 찰진 밥을 좋아하는데, 회사 밥은 고슬고슬하다 못해 밥알이 입에서 날아다닌다. 국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도 국물을 찾게 된다. 오늘의 콩나물국은 밍밍하기 그지없다. 결국 믿을 만한 건 불고기뿐인가. 다행히 불고기는 달짝지근하니 맛이 괜찮았다. 나름 만족하며 다시 불고기에 젓가락을 가져가려는데, 순간 ‘그것’을 보고 말았다.


국물을 머금은 대파와 고기 사이에는 얇은 머리카락이 있었다. 나는 잠시 멈추었다가 가장 커 보이는 불고기 한 점을 집어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덮어버렸다. ‘얘기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그냥 넘어가자. 그리고 더는 불고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두부구이를 아끼고 또 아껴서 반찬으로 먹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김치라도 넉넉하게 가져왔을 텐데.


가끔 밖에서 밥을 먹을 때 반찬에서 머리카락이 나오는 상황을 마주한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람이 한 번 정도는 경험해봤을 듯하다. 그럴 땐 어떻게 하면 될까? ‘머리카락 나왔으니 바꿔주세요’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옆 사람에게 ‘아 뭐야, 머리카락 나왔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대개 아무 말 없이 못 본 척하고 머리카락을 숨겨버린다. 단, 나 혼자 먹는 메뉴에 한해서. 철저하게 그 반찬을 외면한다. 만약 그 반찬에 눈길을 준다면, 그때의 느낌이 생생하게 떠오를 것만 같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엔 학교 급식이 없을 때라 점심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엄마들은 참 대단했다. 반찬 배달도, 반조리 식품도 거의 없을 때였는데 아이들 대부분이 꼬박꼬박 도시락을 싸 왔다. 점심시간이 되면 5~6명씩 옹기종기 모여 책상을 붙이고 자신의 도시락통을 책상 위로 꺼냈다.


반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도시락 반찬 뚜껑을 여는 순간, 교실 안에는 수많은 음식 냄새들이 맛있게 뒤섞였다. 냄새에 취할 여유도 없이, 맛있는 반찬을 선점해야 했다. 반찬 중에서도 인기가 많은 반찬은 티가 났다. 다들 앞다투어 집어가서 금방 동이 났다. 나는 붉디붉은 엄마표 진미채 볶음을 좋아했지만, 내 젓가락은 치킨너깃이나 돈가스를 먼저 향했다. 그 반찬들은 서둘러 챙기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반찬이었기 때문이다.


같이 도시락을 먹는 친구 중에서 김치, 무말랭이, 감자볶음 같은 밑반찬들을 주로 싸 오는 친구가 있었다. 부모님이 바쁘셔서 할머니가 도시락을 싸 주신다고 했다. 그 친구의 반찬들은 내 진미채 볶음보다도 더 오랫동안 도시락통을 지켰다. 도시락 뚜껑을 닫을 때까지도 남아있는 그 친구의 반찬을 보며, 나는 속으로 측은한 마음을 들이쉬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날은 그 친구의 얼굴이 유독 밝아 보였다. “나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직접 반찬 싸 왔다!” 친구는 자랑스럽게 말하며 도시락을 꺼냈다. 친구의 반찬통에는 새끼손가락 길이 정도 되는 햄이 달걀옷을 입고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물론 햄 대부분이 달걀옷을 거의 벗어버린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런데 그 햄 중에서 맨 위에 놓여있는 햄에 무엇인가가 붙어있었다. 머리카락이었다! 나를 빼고는 아직 아무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친구는 정말 자랑스러웠는지 자신의 반찬통을 마주 앉아있는 나에게 불쑥 내밀었다. 나는 고민할 시간도 없이 달걀이 입혀진 햄을,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바로 그 햄을 서둘러 입에 넣었다.


차마 그 햄을 씹지 못하고 한 번에 꿀꺽 삼켰다. 햄이 무슨 맛인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머리카락을 삼키고 있다는 사실만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짧은 순간이 늘어진 비디오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얇은 머리카락이 굵은 실로 변해 꿀렁꿀렁 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맛있지?” 친구는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얼굴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이상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다른 친구들도 앞다투어 그 친구의 햄 반찬을 집어갔다. 친구의 반찬통은 깨끗이 비워졌다. 대신 내 밥통의 밥이 잔뜩 남았다. 나는 그날 밥을 거의 먹지 못했다. 목 안에서는 머리카락이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미 오래전 일인데도, 나는 음식 속 머리카락을 발견하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목이 콱 막혀버린다. 그렇게 진저리 치게 싫어하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채 그 존재를 숨기느라 급급하다. 누군가 이 사실을 안다면 그건 비위생적인 거니까 알려주는 게 옳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마다 자랑스럽게 반찬을 내밀던 그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남몰래 나 자신과 타협을 해본다. 그래, 알려주는 역할은 나 대신 누군가 해주겠지. 그러니 한 번쯤은, 하루쯤은, 나만큼은 눈감아줘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나의 울렁거림을 반찬 속에 꼭꼭 숨겨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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