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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를담다 Apr 23. 2022

나의 결핍이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각자의 몫 감당하기


학교에 9살이 된 큰아이를 데리러 갔다. 멀리서 지켜보았더니 교실에서 나오자마자 뛰어서 친구를 따라가다 말고 되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인사를 하려다 만 것 같았다. 순간 울컥하고 마음이 저렸다. 아이는 내 모습을 발견했는지 멀리서 달려왔다. 안쓰러운 마음에 나도 함께 달려가 꼭 안아주었다.

"예준아. 친구 따라가려고 했던 거야?"하고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가 이야기했다. "아니요. 금붕어 보러 갔다 왔는데요."   

또 오판이다. 그냥 '잘 다녀왔어?'라고 물어보았으면 되었을 것을 오늘도 어김없이 내 생각대로 해석하고 말았다. 아이는 자신만의 생각과 방식으로 학교에 적응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엄마의 자리에서 오직 나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내 경험치만큼만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었다. 혼자 노는 것처럼 보였고, 친구가 없어 외로워 보였다. 어렴풋한 짐작만으로도 가슴이 요동을 쳤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건 나의 문제가 분명했다. 아득한 기억 속에서 혼자 놀며 외로워했던 먹먹한 감정들이 가슴속을 비집고 나왔다. 언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르는 연약한 감정 탓에 한걸음 걷는 것조차 두려웠다. 조심조심 건드려지지 않도록 더 이상은 무너지지 않도록 주변의 눈치를 보며 아슬아슬하게 걸어왔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나는 분명 어른이 되었는데 어린 시절 해결되지 못한 결핍이 지금을 평화롭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경험 때문에 마음에 이렇게도 묵직한 쇳덩이를 지니고 다닐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이를 가지기 전 언니 식당에서 생활을 하며 도와준다는 조건으로 내 원룸 보증금을 언니에게 보태었다. 언니는 음식을 하고 나는 차로 배달을 했다. 월 50만 원을 챙겨가지 못하는 날들이 많을 만큼 경제적으로 불안했다. 10년째 누워계신 아빠와 우울증에 걸린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우며 식당을 하는 우리 언니, 오빠 부부의 잦은 싸움으로 맡겨지는 어린 조카. 전재산을 다 털어 넣고도 월세방 한 칸 겨우 빌린 우리 부부. 나는 얼른 돈을 모아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늘 나름의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고 어른들의 경제적인 보탬 없이 결혼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풀릴 기미라고는 없는 집안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 주변을 둘러보며 나보다 더 힘들고, 더 가난하고, 더 어려운 사람을 찾아 비교하는 습관이 부쩍 심해졌다. 나와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렸고 그에 따라 잘 사는 사람들을 시기하며 후회하고 원망하고 자책하는 시간들도 늘어만 갔다. 그것 말고는 나에게 위안이 되는 것 따위는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이를 임신했고 8개월에 접어들었을 즈음 아빠는 힘겨웠던 삶을 마무리하셨다. 곧 장례가 치러졌고 몇 주 뒤 나는 나만큼이나 부정적이고 예민한 아이를 낳았다.




아이에게 내가 어린 시절에 받아보지 못했던 사랑을 남김없이 주고 싶었다. 남김 없는 정도를 넘어 꾹꾹 눌러 담아 흘러넘치도록 주고 싶었다. 나와 같은 결핍을 절대로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은 오로지 아이의 위주로만 돌아갔다. 엄마라는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스스로에게 막대한 임무를 주었다. 책에서 시키는 대로 '앙'하면 원하는 것을 즉시 주었고, '앙' 할만한 일은 웬만해선 만들지도 않았다. 흐릿한 기억을 붙잡아 내가 엄마에게 받고 싶었던 사랑과 다른 엄마의 부러웠던 면까지 보태며 그 어떤 결핍도 없도록 해주었다. 내가 그런 식으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엄마에 대한 원망이 끝도 없이 늘어났다.


'엄마는 왜 이렇게 해주지 못했을까. 아무리 어려웠더라도 이 정도 마음은 써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들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나도 엄마니까 엄마를 이해하려 하기도 해 보고 이해를 받고 싶어 하기도 했다.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도 엄마에게 유일하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변함없는 꾸지람, 해결책 없는 걱정뿐이었고 어깨에 짐만 하나 더 얹게 되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 싫어 연락조차 뜸해졌다. 내가 엄마를 원망하고 싫어하는 것처럼 아이가 나를 싫어하는 게 두려웠고 싫었다. 엄마가 나를 이런 환경에서 이렇게 키웠기 때문에 내가 이럴 수밖에 없다고 모든 걸 떠넘기며 이게 다 엄마 때문이라고 증명하고 싶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원망을 할 수 없는 위치에 놓여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엄마손을 벗어나 자신감이 생긴 나는 그 원망의 에너지를 딱 엄마에게만 사용했다. 아빠는 이미 돌아가셨고 엄마만이 살아계셨으므로. 아이를 보며 내 감정이 건드려질 때마다  '엄마 때문이라고. 엄마 때문에 내 어린 시절을, 아니 내 삶을 통째로 도둑맞았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생각 속에 사로잡히게 되자 1분 1초도. 그 어디에도 '나'라는 주어를 가진 사람은 없었고, 아이에게 헌신적인 엄마라는 단 한 사람만이 존재했다. 전쟁에서 죽음만을 앞둔 전사처럼, 다른 대안은 전혀 없는 것처럼 치열하게 저항만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분명 엄마와 다르게 완전한 사랑을 주었는데 아이가 행복해하지 않은 날들이 많은 것 같았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에게 바랬던 조금의 사랑을 훨씬 초과해 넘치도록 주었음에도 아이는 항상 모자라 했고 늘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다. 내 역량을 지나치게 초과하는 일이었다. '내 아이는 상처받지 않아야 하니까'라는 전제를 깔고 입맛에 맞춰 주었더니 아이는 또 다른 것을 더 달라고 심술을 부렸다. 사소하고 작은 일에도 예민했고 조금도 참지 못했다. 아이가 원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랑을 미리 주어 해가 되는 경우가 빈번히 생기기 시작하자 끝이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갯속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내가 손을 뻗어 더듬어 보아도 아무것도 잡히지가 않았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이따금씩 공허했고 괴로웠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누구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인지' '정녕 아이를 위한 것이 맞는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만 했다. 그토록 흔들리고 깨지는 감정이 누구의 감정인지 구분해야만 했다. 그게 아이도 나도 살길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씩 하다보니 나를 보며 떼쓰고 우는 아이가 결핍을 가진 것이 아니라, 떼쓰고 우는 아이를 지켜보지 못하는 과거에 상처받은 내 마음의 결핍이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아이를 돌보는 건 엄마인 내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나였다. 나는 그 아이에게 완벽하게 감정 이입을 했고 어린시절의 그 아이를 살뜰이 보살피고 있었다. 지금의 내 아이는 그때의 내가 아닌데 어린시절의 나의 마음을 가져다가 지금의 내 아이의 마음일 거라 단단히 착각을 했다. 성격도 성향도 환경도 완전히 다른 아이를 극과 극인 나의 어린 시절에 대입을 했으니 어긋나는 이유는 확실했다. 나는 비로소 각자의 몫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지구에서 태어나 스스로 세상을 경험하고 부딪혀볼 기회를 빼앗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가 맞았다. 엄마를 지독히도 원망했던 나에게 다시 화살이 꽂혔다.


상처는 치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그 상처와 더불어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어디로도 숨을 필요가 없다.

<너를 어쩌면 좋을까/곽세라/ 쌤앤파커스>


10년을 아프셨던 아빠는 더 이상의 고통이 없는 곳으로 가셨고, 엄마는 자식과 손자들을 근처에 두고 잘 지내고 계신다(3명의 자녀들이 모두 주변에 산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니까) 혼자 아이를 키우는 언니는 조카와 단둘이 살 수 있을 만큼 벌이가 괜찮아졌고, 오빠는 새언니와 함께 일을 하며 벌써 5학년이 된  조카와 어긋남 없이 잘 지내고 있다. 10년 전에는 그랬었지만 지금은 분명 상황이 달라졌다. 상황은 이렇게도 끊임없이 변해왔었는데.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할 텐데, 정작 나는 10년 전 보다 더 앞선 30년 전의 나에게서 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무의식 중에 '엄마. 아빠. 오빠. 언니. 나' 라고 대답하는 나를 발견했다. 신랑에게 물었더니 현재의 우리 가족 '나. 와이프. 예준. 예린'이라고 대답했다. 그래. 나의 가족은 여기에 있었다. 내가 사랑이라는 이름을 덧 데어 아이에게 주었던 것은 스스로에 대한 끝없는 연민이었다. 엄마를 원망하면서 여전히 내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했다.


득이 될 것 없는 감정이입부터 해결해야 했다. 아이는 신랑과 나 사이에 태어났고, 나는 이미 할 수 있는 역량의 최대치를 해내고 있다.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내 행동의 단면을 낱낱이 설명해야만 했다. 일상에서 건드려지는 작은 상처들이 '찌릿'하고 머릿속에 떠오를 때면 수첩에 적거나 휴대폰 노트에 기록해 나가기 시작했다. 앞 뒤 맥락조차 맞지 않은 글들은 그렇게 차곡차곡 쌓였고, 바다도 가고, 산도 가고, 꾸준히 몸을 쓰며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랑받거나 이해받기 위한 인간관계는 대부분 정리를 하기 시작했고, 무섭고 두려웠지만 무슨 일이든 용기를 내어 혼자 해결해보려 애를 썼다. 하루하루가 쌓이는 동안 보이지 않게 상처가 조금씩 아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형체도 없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신랑에게 기대거나 미리 겁을 먹고 떠넘기기 바빴던 내가 일상의 대부분의 일을 혼자 해결해가며 지내는 것이 점차 어렵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어느 구간에서 상처를 받고 감정이 흔들리는 사람인지 아는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타인에게로 새어나가는 에너지를 나의 내면으로  돌리는 연습 덕분에  내면의 아이(inner child)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더라도 예전처럼 옆자리를 완전하게 내어 주지는 않게 되었다. 그 아이가 오랫동안 머무는 시기도 있지만, 대부분은 조금만 보듬어주고 달래주면 '다음에 또 올게' 하며 손을 흔들고 금방 돌아서는 날도 생겼다. 순간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은 여전하지만 수렁으로 빠지지 않도록 붙잡을 수 있는 힘은 예전보다 많이 생긴 것 같다. 스스로에게 지은 '단단'이라는 두 번째 이름이 준 선물이 아닌가 싶다.


이토록 나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았더니 어린 시절의 결핍을  단순하게 엄마의 탓만으로 돌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 나가다 보니 모든 상황은 엄마만을 미워할 수는 없는 일이 되었다. 오랫동안 꾸준히 엄마를 원망해본 덕분에 엄마도 나에게 준 사랑이 본인이 줄 수 있는 최대 역량치의 사랑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에게 이런 순간도 존재하는구나 싶었다. 아직 그때의 미운 감정은 남아 있지만 예전의 미움과는 또 다른 감정이 생겼다. 엄마도 받아보지 못해 방법만이 달랐을 뿐 내가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그 어느 곳, 어느 순간에서도 엄마의 사랑은 항상 존재했다. 결국은 나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건 엄마와의 화해가 아닌 나 자신과의 화해와 가까웠다. 그때의 나는 이 자리에 없고 내 아이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당신이 만일 그 보트에 타고 있었고 당신한테 총이 있었다면 당신은 나를 쐈을 것이다. 하지만 총으로 나를 쏘는 건 나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누구도 나에게 사람 사랑하는 법, 이해하는 법,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돌봐주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는 무엇은 해도 되는 일이고 무엇은 하면 안 되는 일인지를 몰랐고 인과응보도 몰랐다. 나는 어둠 속에 살고 있었다. 당신한테 총이 있으면 당신은 나를 쐈을 것이고 나는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도 나를 돕지 못했을 것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아무 교육도 못 받고 자랐다면 나 역시 해적으로 되는 걸 피할 수 없었으리라. 그 환영을 보았을 때 내 속에서 증오가 사라졌고 나는 그 해적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

어디에서 태어나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지에 따라서 나는 겁탈당한 열두 살 소녀일 수도 있고 해적일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집입니다/ 틱낫한/불광출판사>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타인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나도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이도 이런 나를 싫어하지 않을 거라는 용기가 생겼다. 설사 아이가 나를 싫어한다고 해도 엄마의 존재까지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엄마를 지독히 원망하면서도 싫어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지금 내가 쏟을 수 있는 에너지 내에서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고, 행여 아이가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슬픈 고백을 한다면 주저 없이 온 마음을 다해 용서를 구할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를 싫어하게 된다면 묵묵히 내 진심을 보여주는 것 말고는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내 손을 떠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라는 삶에만 나를 매어 놓지 않고 내 몫도 챙겨가며 살아가기로 했다. 내 아이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내 몫의 책임을 하는 것 말고 나머지 일들은 오로지 아이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요즘 들어 나에게는 또 하나의 큰 고민이 생겼다. 그것은 아이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 먼저 말하지 않고 기다려 주는 일이다. 모두들 처음이 있으니까. 나도 그랬고, 너도 그랬고, 누구든 그랬으니까. 내가 먼저 살아보았다고 아이가 알아가야 하는 순서를  바꾸면 안 되는 법이니까. 아이의 속도와 방식대로 세상을 풀어 가도록, 스스로 겪어가며 해결을 해나갈 수 있도록 두눈을 꼭 감으리라 다짐을 하지만 내 생각과는 반대로만 하는 아이를 볼 때마다  말을 아끼며 지켜만 보는 일은 아직까지 나에겐 너무나도 어렵.(나는 늘 입이 간지럽다) 오늘도 '아차'하며 '찰나'를 놓치고 어느새 아이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또 후회를 했다. '아..이러면 안되는데..'  나는 얼른 냉장고에 붙여 놓은 시를 다시 한번 더 읽었다.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 박노해


(...) 그러니 내 아이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은

내가 먼저 잘 사는 것, 내 삶을 똑바로 사는 것이었다.

유일한 자신의 삶조차 자기답게 살아가지 못한 자가

미래에서 온 아이의 삶을 함부로 손대려 하는 건

결코 해서는 안 될 월권행위이기에

나는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자 안달하기보다


먼저 사람의 좋은 벗이 되고

닮고 싶은 인생의 선배가 되고

행여 내가 후진 존재가 되지 않도록

아이에게 끊임없이 배워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저 내 아이를

'믿음의 침묵'으로 지켜보면서

이 지구별 위를 잠시 동행하는 것이다.

<마녀 엄마/ 이영미 / 남해의 봄날>


나의 에너지의 총량을 잘 계산해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하지 않고 내가 견딜 수 있는 정도로만 육아를 할 것이라 마음먹는다. 그러려면 아이의 행동에 대응하는 나에게 "누구의 결핍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야만 하고 또한 '누구의 몫인가'를 구분해야만 한다. 언제까지나 내가 아이의 몫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서로가 각자의 영역의 선을 넘지 않는 알맞은 거리와 위치에서, 지금처럼 잘 지내고 싶다.


본의 아니게 나는 이미 태어나 버렸고, 살아오는 동안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여러 가지 고충을 해결해 가며 이 자리까지 왔다. 앞으로도 크게 다를 건 없을 것 같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큰 사명감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살지 않기로 했으므로 나의 행동을 통해 나 자신 혹은 아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욕심도 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선을 다해하되 그 어떤 결과도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를 오늘도 해나간다. 아이를 내 입맛대로 바꿀 수는 없지만(그럴 필요도 없다) 내 마음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기도 하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며 오늘도 아이에게 해가 되진 않았는지. 아낌없이 오늘을 살았는지 다시 한번 살펴본다. 오늘 일어난 일도 어제는 전혀 몰랐듯이, 내일 또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온전히 받아들이며 잔잔히 흘러가기도 하고, 다른 길로 돌아가기도 하고, 멈춰서기도 할 것이다. '왜 저렇게 서있지?'하고 되묻는 사람들에게는 답을 해주지 않을 예정이다. 가만히 서있는 것 같지만 알게 모르게 나는 꾸준히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냥 그렇게 살고 싶다. 딱딱하지 않고 유연하고 말랑말랑하게..



주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하게 해 주시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공지영/오픈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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