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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를담다 May 04. 2023

나를 돌보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나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란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나는 알고 있는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나는 사랑하는가?

<당신의 생각은 사양합니다/ 한경은/수오서재>


나는 누구에게든 칭찬받고 싶었고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으로 보이 애를 쓰고 살았다. 나를 품어 주어야 할 가족들의 습관적인 공격과 거친 기운들 때문에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해명하는 데에 살아온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다 써버렸다. 나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 시간보다는 친정 가족들과 남들을 위해 움직인 시간들이 더 많았으므로 내 안의 사소한 감정조차 알아차릴 겨를 없는 삶이었다. 못 배우고 가난했기에  "내 가족은 이런 대접을 받게 하면 안 돼"라는 사명감이 나를 지배하게 했고 스스로를 홀대하며 못살게 굴었다. 친정 가족들과 남들에게는 이해와 용서가 쉬웠지만 스스로에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었고 날아오는 화살은 내가 나서서 맞으려 노력다. (그게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스스로에게 가장 좋은 사람이 되어 주어야 했지만 온전한 사랑이 아닌 조건부 사랑만을 받아온 탓에 이런 삶이 숙명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대하는 시간들에 익숙해져만 갔다.


좋은 평가보다는 나쁜 평가만을 듣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다 보니 상대가 만족할 때까지 나를 소진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애를 쓰고 최선을 다하는 생활 지속했지만 원하는 상황이 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고 내 노력에 대한 대가가 원망으로 되돌아올 때면 억울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배타적인 성향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나를 이해해기만 한다면 내 모든 것을 쏟을 자신이 있을 만큼 누구라도 붙들고 사랑받고 싶었다. 그가 내가 되어야 했고 내가 그가 되어야만 했던 대상영속성이 없는 어린아이 같이 이기적이고 중심 없는 감정들이 뒤죽박죽 뒤엉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조금만 잘해주면 구름 위를 날아다녔고 좋지 않은  한마디엔 지옥으로 추락했다. 나의 감정의 주인은 내가 아닌 타인이었다.


부모에게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한 나는 타인에게서 그 목마름을 해결하려 했던 것 같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나를 믿지 못했고 사랑을 받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것 같다. 늘 부족해 보였기에  타인이 부러웠 거울을 비추듯 타인의 반응을 통해서만 나를 평가하고 이해하려 했다. 다른 이들에게 좋은 평가를 듣기 위해서는 나의 노력을 인정해 주는 나를 아주 잘 아는 사람들만을 만나야만 했기에 인간관계의 폭은 바늘구멍만큼이나 좁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만남은 하지 않으려 선을 긋기도 했다.


그렇게 나와 비슷한 환경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만 만나다 보니 나의 사고방식은 차가운 겨울강에 떠 있는 오리처럼 한자리만을 맴돌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 딱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헤엄을 치던 나는 내가 떠있는 곳만이 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는 것.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지구에는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과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 당장 내 눈에 보이지 는다면 아무것도 려 하믿으려 하지도 않았다. 편견이 가득했고 부정적인 상상이 이어졌다. 뭐든 맞닥뜨리는 용기가 부족했던 나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 갈수록 어렵고 두려워 경험을 할 기회를 자주 놓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주변을 되돌아보니 내가 그렇게나 믿고 의지하며 만나던 사람들도 딱히 나를 이해해 주는 것 아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오로지 내 생각에만 사로 잡혀 있었듯 나 이외 다른 이들도 자기 삶을 살기에도 바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믿지 못했던 나 주눅과 우월감과 조바심을 번갈아가며 사용하면서 불안함을 숨기려 과장되게 표현하는 일들이 잦아졌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피곤 해지는 건 예견된 결과였다. 내가 아닌 모습을 유지하느라 버거웠고 진심을 드러내지 못해 외로웠다. '별것 아닌 내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게 된다면 무시를 받을 거야'라는 망상에 사로잡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겪어내야 할 나만의 몫'이라 생각해 버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열등감이었다. 그스스로에게 엄벌을 내린 거나 다름이 없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 "너만 하면 괜찮은 거야" "너보다 더한 사람도 많아""일단 내 이야기 먼저 들어봐 내가 더 힘드니까"라는 가족의 무책임한 말들 속에서 남과 비슷한 흉내를 내며 휩쓸린 채 따라다녔다. 나는 지금 괜찮지 않은데도 "내가 너보다 더 힘들어" "고작 그런 것 가지고 그러냐"라는 이해 없는 무책임한 말이 가득한 환경이었다. 내가 이런 마음을 품는 것조차 철없고 먹고살만한 이기적인 사람이 될 뿐이었던 상황 속에서 "우울증도 다 먹고살만하니까 오는 거지. 다들 먹고살만하고 배가 불러서 그래"라는 공감 모르던 엄마의 말이 과거의 기억을 타고 오늘도 나의 두 귀를 날카롭게 찔러댄다.


결과적으로 겨우 남과 닮기 위해 하루하루를 잃어버렸다.

<기나긴 하루/ 박완서/ 박완서>


이대로 주저앉기에는 그간내 삶이 너무나 억울하고 불쌍했다. 어릴 때부터 정답인 줄 알고 따랐던 엄마의 사고방식은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완벽한 오답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내가 밤잠을 설쳐가며 두고두고 괴로워했던 일련의 사건들은 어린 내가 만들었던 조건 상황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모르던 투명한 아이가 해결해야만 했던 일들은 더더욱 아니었다는 것. 어렸기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내 삶에서 맞이 어렵고 무섭고 힘들었던 일들을 해결 것이 부모 존재하는 이유라는 것을 두 아이를 낳아 기르고 초등학교에 보내게 된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이제껏 내 몫이라 여기던 것들 모두는 어린 내가 하지 않아도 되었던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고 기특해했던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그때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그때 내가 얼마나 두려웠는데.. 어린 내게 자신의 감정을 남김없이 쏟아냈던 엄마가 가슴 터지게 미워졌다. 여리고 눈물이 많던 여자 아이는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우주와 같은 부모님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이답게 지낼 수 있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자 분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엄마 아빠가 알아서 할게'라는 그 한마디가 듣고 싶다. 부모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 겪어내야 할 몫이 부모보다 많다고 느던 그 아이에게 "지금 네가 하는 생각과 사고방식이 모두 네 탓만은 아니야. 살아오면서 스스로가 비겁하다고 느꼈던 감정들 너만의 잘못이 아니었어. 그런 삶 속에서 이만큼 올바르게 자라온 게 기특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엄마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더 이상은 엄마감정 귀신에게 휘둘리지 않겠다 결심했다. 기댈 데 없어 외롭고 가야 할 방향을 몰라 헤매던 나는 스스로 모든 것을 책임질 수밖에 없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부터 인지야 했다. 이제는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과 지갑이 되는 삶으로는 살지 않겠다고. 낳아준 값으로 그만큼 가져다 쓴 거라면 앞으로의 나의 역할은 sold out이라고. 내 영혼을 태워 원 없이 베풀어 보았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기존의 생활환경과는 거리를 두고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밀어내지 않고 겪어보려 했다. 다른 환경의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열고 세상과 연결된 뉴스와 sns 미디어는 되도록이면 보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어린 시절의 환경과 연결되어 나쁜 기운을 퍼트리는 사람들은 그 누구라도 멀리했다.(엄마가 1순위 언니가 2순위였다) 여전히 많이 깨어지고 흔들리고 있지만 의식적으로라도 신경을 쓰다 보니 신기할 정도로 내 주변이 바뀌기 시작했다. 타인을 통한 인간관계가 아닌 오직 나만의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다양한 직업과 다양한 성격을 지닌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니 좋은 사람이 오더라'라는 말이 생각났다. 나에게 좋지 않은 기운을 주는 사람들을 멀리하지 않는다면 어떤 상황을 겪게 될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 마음을 놓치지 않도록 의식을 깨우며 스스로의 내면을 꾸준히 점검고 있다.




주변에 밝은 분들을 만나게 되면서 내 삶을 되돌아보다 보니 디딜언덕 없는 현실에만 사로잡혀 돈을 아끼고 저축하는 데에 남은 삶을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언제 행복한지 내가 좋아하고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한 채 오로지 통장에 찍힌 금액 내 자존감의 근간이었고 살림 잘하는 가정주부로서의 역량을 증명할 수 있는 성적표 생각했다. 그러면서 차곡차곡 아껴 모운 현재의 행복이 아닌 미래를 위한 무기와 총알로 비축하기 바빴다.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전쟁을 대비하며  본질에 집중하겠다는 핑계로 '미니멀라이프'라는 이름을 붙여 검소한 삶을 유지하는데 몰입하게 되면서 또 다른 방식으로 나는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생활이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경험이 없어 누리지 못하는 것소명이 있는 사람인양 포장하며 스스로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기면서 개운하지 않은 마음이 들었. 분수에 맞지 않은 명품가방과 비싼 옷들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욕구를 억누른 것이지 진짜 내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했다. '내 아이에게는 이런 고통을 주지 않으리. 내 신랑에게는 이런 아픔을 주지 않으리' 라며 과거의 결핍을 지금 내 가족에게 그대로 옮겨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 그 방식으로 또 한 번의 지나친 사명감을 가지는 동안 오히려 나와 가족들을 더 못살게 굴거나 브레이크를 걸고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사실 나는 아이들에겐 모든 돈의 사용이 너그러웠지만 남편과 스스로에게는 참으로 인색했다. 무언가를 할 때마다 금전적인 압박 먼저 느끼던 나는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정신적 에너지를 지나치게 소모하고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스스로를 옥죄며 알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하느라 작은 것 하나도 누리기 어려운 사람으로 변질되어 있는 모습을 보며 탈감과 공허함이 동시에 밀려들어오기도 했고 내 안의 깊은 곳에서 누르고 있었던 부러움과 질투, 시기심 발견는 일이 잦아졌. "아. 나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은 사람이었구나" 부모에게서 채워진 곳간이 없었 내 욕구를 표현하는 것 매우 어워하 나는 결혼 후 남편이 채워준 진실된 사랑에도 종류가 르다는 이유를 들어 채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렇게 까지 스스로에게 인색하게 살다가는 남아 있는 곳간의 식량마저  쓰지 못하게 어버지 않을까 려스러 마음이 들면서 나와 살며 누릴 것을 누려 보지 못한 신랑이 문득 불쌍하게 느껴졌다. 엄마의 곳간과는 다르지만 이제는 내가 우리 신랑의 곳간이 되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를 잘 알게 된 언니가 물었다.

"네가 그렇게 돈을 모으는 이유가 뭐야?"

"내 자식에게는 부담 주고 싶지 않아서"

"너는 돈이 없어도 자식한테 부담 주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 부부가 이렇게 힘을 합쳐 돈을 모으는데만 혈안이 되었던 까닭은 앞서 말한 내 환경과 마찬가지로 남편도 부모님의 빚로 인해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평범하지 않으셨던 부모님 탓에 또래보다 남다른 고생을 했었결혼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자식에게만은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만 했 사람이었다. 남편이라고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이 갖고 싶지 않았겠는가. 단칸방에서 시작한 우리 남들이 평범하게 즐기는 일상 주제넘은 짓이라 생각을 하며 하나를 가지게 될 때마다 '내가 지금 이래도 되나' 라며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 잡히는 일상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예전과는 다른 환경이 된 우리 부부는 여전히 단칸방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욕망이라고 다 나쁜 것일까? 그 욕망을 원동력 삼아 지금의 내 삶을 더 풍요롭 단단하게 만들고 나를 지키는 수단으로도 사용할 순 없을까? 제일 먼저 결혼 전부터 18년 동안 탔던 차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우리 형편에'라는 말로 경차 사자 마음먹었지만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진짜 원하는 욕망의 소리를 들어주고자 했다. 실로 엄청난 시도였던 차량구매가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게 될지는(좋을지 나쁠지) 모르겠지만 그 어떤 결과나 후회가 따르더라도 책임을 지며 헤쳐나가자 다짐했다.


"여보 우리 그동안 고생했잖아 자기가 진짜 갖고 싶었던 차로 골라. 그걸로 하자 우리"


숨겨왔던 욕망을 옵션으로 대체한 대형 SUV가 도착했다. 첫 시승을 하던 남편이 말했다. "이 좋은걸 자기들끼리 타고 있었단 말이야?" 우리 부부에게서 진심으로 밝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현금으로 차를 살 수 있을 만큼 열심히 살았던 우리 부부는 더 이상 스스로를 지나치게 낮추어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며 살고 싶지 않다. 마음속 단칸방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자신을 가두는 건 오로지 나뿐이다.


그때 우리는 '부모 손에'키워졌지만 지금은 당신도 나도 '내손'안에 놓여있다. 내손이 나를 키우고 있다.

"그래요. 당신이 다섯 살 때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 녀석'이라고 말한 사람은 당신의 아버지였어요. 하지만 그 후 30년 동안 그 말을 수천, 수만 번 되풀이해 들려준 사람은 당신 자신이지요. 타인은 그 어느 누구도 당신 스스로가 하는 것만큼 당신을 집요하게 괴롭히지 못해요.

<너를 어쩌면 좋을까/ 곽세라/ 쌤앤파커스>


"여보. 우리가 차를 산건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야. 이제껏 우리 둘 다 불우한 환경 때문에 스스로의 처지를 낮추고 얕잡아보고 깎아내리기 바빴잖아. 지금은 아닌데. 우리가 노력한 만큼 굉장히 좋은 환경이 되었는데 우리를 보살피는 법을 잘 몰라 누리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살고 있었던 것 같아. 우 이제는 과거로 도돌이표 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 보자. 그건 우리들의 부모님의 삶이었지 우리의 삶이 아니었잖아. 그 삶을 우리 것으로 가져오지 말고 우리 삶은 지금처럼 우리가 잘 만들어 가보자. 리의 노력으로 산 지금의 차 우물 안에서만 살았던 우리의 시각을 넓혀주고 또 다른 세상으로 나가가는 계기가 되게 만들어 줄 거야. 이제는 우리도 스스로의 가치와 자존감을 높이고 살자. 우린 그래도 되는 사람이야. 그간 사치라고 느끼며 참았던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해. 열심히 살았고 또 열심히 살면 돼. 이제부터 우리가 우리 자신의 소리를 신경 써서 들어주고 잘 보살펴주자" (남편과 나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잃어버린 것들과 찾지 못한 것들 이제와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나를 키우던 부모님의 나이가 되어고 그 시절의 나같은 아이를 둘이나 낳 기르고 있다. 생떼 쓰는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아닐까 하며 스스로의 다짐을 두려워할 때 즈음 오랜 친구를 만났다. 친구에게서 "자꾸 이해를 하려 하지 말고 그냥 이해를 하지 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와는 다른 자유분방한 성격의 친구만의 삶의 방식이었다. 명쾌했다. 알지도 못하고 알아주지도 않을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이해를 하려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아마도 상처의 굴레를 평생 동안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나는 그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은 무언의 소리와 죄의식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않고 스스로에게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기로 했다. "그건 네가 하지 않어도 돼. 네 역할이 아니었어."라고 말이다.

나를 위하는 길이 세상을 위하는 길이다. 내 길은 내가 겪어내겠다는 마음으로 그 누구의 핑계를 대거나 내 몫을 떠넘기지 않고 내가 내 이야기를 천천히 들어줄 것이다. 무얼 좋아하는지, 언제 즐거운지, 언제 슬픈지, 언제 나의 욕구들이 샘솟는지, 언제 자신감이 솟구치는지, 앞으로 내 안에 숨겨두었던 나의 다양한 면을 찾는 긴 여정을 보낼 예정이다. 그 여정 속에서 나를 찾을 수 있을지 아니면 되려 잃어버리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깨어지든 무너지든 다시 일어서든 내가 겪어내야 할 일은 숨지 말고 겪어 낼 것이라 다짐한다. 그렇게 스스로 성취하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그 쌓인 벽돌의 수가 많아질수록 스스로 더 당당 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워 나갈 것이다. 앞으로의 삶은 과거로 인해 무너지지 않는 삶이기를 바란다.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우리가 타인의 인정에 목매는 이유는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이뤄낸 것, 이미 끝을 맺은 것, 여전히 해나가고 있는 것, 이런 것들을 내가 너무 몰라주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러면서 나를 무시하지는 않았나? 나의 가치를 깎아내리면서 나의 존재 이유를 외부에서만 찾고 있진 않은가? 그렇다면 실망과 공허만 거듭되고 너덜너덜 소진되며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게 된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미 내 안에 다 있다. 사랑도, 인정도, 행복도 자유도 내 안에 있다. 그러니 타인에게 받고 싶은 칭찬과 인정을 스스로에게 해주자. 남이 해주는 건 한계가 있지만 내가 해줄 때는 받고 싶은 만큼 원 없이 받을 수 있다. 손발이 오그라들도록 나를 추켜세워주자. "정말 대단해" "네가 최고야" "해날 줄 알았어" "지금까지도 정말 잘한 거야" 우리가 그토록 듣고 싶은 말이 아닌가. <당신 생각은 사양합니다/ 한경은/ 수오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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