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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Nov 05. 2024

내가 제일 좋아하는 11월이 되었다.

11월이 되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이다. 단풍 든 거리는 아름답지만 조금 스산하기도 한 계절이다. 달콤 씁쓸한 느낌(bitter sweet)이 최고조에 달했던 인생의 어느 한 시절을 닮은 계절이다. 자의식이 아직 강하지 않던 해맑은 유아기도 아니고 인생의 가장 바쁘고 힘겨운 시간을 보냈던 30, 40대의 쓰디쓰기만 한 시기도 아닌 애매해서 힘들었지만 가장 아름답기도 했던 대학교 1, 2학년 때를 정의하는 달이다.

며 칠 전 뜬 3년전 11월의 어느 날



11월을 정의하는 딱 한 장면이 있다. 학교 제일 구석에 처박혀 있던 교육관으로 가는 늘 가던 길이 아니라 그날은 무슨 일인지 혼자서 위쪽 기숙사 건물 근처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던 숲길 같던 길로 가는 중이었다. 그날도 멋 부린다고 옷은 얇게 입어 한기를 느끼며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그 길을 우울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인생이 공허하다는 것은 알았는데 세상엔 여전히 아름다운 것들은 많고 그것들이 나에게는 속하지는 않는 거 같아 슬픈 기분? 그런데 그 우울한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 짧은 숲길이 어느 유럽의 비밀 정원 같기도 하고 그 음울한 날씨와 어우러져 슬프지만 행복한 기분에 한껏 빠질 수 있었다.


11월이 되면 그때가 떠올라 지금도 그런 기분에 한 번 더 빠져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지나가버렸다. 아무 걱정 없이 그런 기분에 푹 빠질 수 있던 시간이었다. 그때는 내가 제일 힘들고 미래는 암울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로지 나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다.


요즘은 이 좋은 계절을 가평 수목원과 홍제천으로 해서 북한산 자락길로, 우면산 둘레길 같이 자연이 펼쳐진 곳은 어디든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만끽하고 있다. 어릴 때 별로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등산복 입은 뽀글 머리 엄마들의 모습이 지금 딱 우리의 모습이다. 육아와 집안일에서 이제 막 벗어나 잊고 있던 나의 시간을 찾자는 마음으로 뛰어나온 노년을 앞둔 여자들, 등산복에 뽀글 머리는 아니지만 그때 아줌마들이 왜 그러고 다니셨는지 백번 이해되는 나이가 됐다.

가평 아침고요 수목원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던 자연을 보며 감탄에 감탄을 하는 새로운 나를 만난다. 어릴 때의 감성과는 또 다른 세상을 보는 여유가 생긴 느긋한 감성이다. 젊을 때라면 가지 않았을 산과 수목원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고 좋은 공기가 몸에 직접 느껴지는 새로운 11월이다.

홍제천


이제 나에게 11월의 색이 조금은 변하고 있지만 감성에 가득 찼던 어린 나도 저 아래 여전히 숨어있다. 지금과는 다르지만 대체 불가한 아름다운 색으로 나를 이루고 있다. 귀엽고 조금은 슬펐던 뿌루퉁한 20대 초반의 나를 자주 추억한다. 어렸던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도 간직한 채로 11월을 시작한다.


과거를 돌아볼 때 난 늘 명확하게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보다 뭔가 신비롭고 아련해서 눈에 잘 담기지 않고 쥐어지지도 않던 것을 혼자서 음미하던 순간들이 더 깊이 기억에 남아있다.


지금 이 시기를 추억할 70대, 80대를 위해서 그런 것들을 부지런히 주워 모으러 다녀야겠다. 특히 11월에. 그런 순간은 너무 희귀해서 의도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 딱 포착되곤 한다. 나의 감성까지 어우러지는 그런 순간을 더 많이 자주 찾으러 다녀볼 생각이다.


어릴 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쉽게 정보를 찾을 수 없다 보니 상상력이 한없이 펼쳐지고 그 나이 때의 대체 불가한 감성까지 합해져 그런 것들이 아주 많이 생겨났다. 지나고 나니 너무 소중한 시기였는데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쌓았으면 그것으로 평생을 풍족하게 살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술집과 카페에 앉아 너무 많은 헛소리들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더 다양한 사람들도 만나보고 더 진한 사랑도 해보고 가보고 싶던 곳을 직접 많이 찾아다녔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유년기에서 20대까지의 경험과 그때 쌓은 이미지들이 나의 보물창고였다. 그걸 이렇게 계속 꺼내보게 될 줄 몰랐다. 그것들이 내 취향을 만들고 나의 감성을 채웠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다 인생 초반의 경험들과 연관되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 음악, 책, 취향 모두와 내 그림의 장면들 다 어릴 때의 아련하고 흐릿한 기억에서 시작되었다.


그때는 그렇게 처음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말랑하게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받아들이다 보니 짧은 시간인데도 그토록 많은 것들을 쌓을 수 있었다. 지금은 본 순간 나의 많은 데이터들에 의해 즉시 판단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감성이 생기기 전에 착착 분리되어 이미 있던 나의 서랍 속에 녹아들거나 즉시 폐기된다.


그러다 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이 극히 드물어졌다. 받아들이는 시기가 끝나면서 지금은 과거를 추억하고 그것이 쌓여 만들어진 나의 의미를 찾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때와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시기이긴 하다. 그때와는 조금 다른 색깔이지만 지금만의 감성으로 또 다른 보고를 채워나갈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걸 잃지 않아야 여전히 젊은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거 같다.


그래서 이번 11월도 매우 바쁠 예정이다. 나의 보물 창고를 채우러 매일매일 돌아다녀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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