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띄운 종이배처럼
어금니가 빠졌다.
막내동생이 '아무거나'를 말하지 않고 오랜만에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 했고, 그 음식을 배달주문하여 받고 막 입에 넣은 참이었다. TV에서 틀어놓은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듣는 소식 만큼이나 황당한 순간이었다.
은이 씌워져있는, 진작에 빠졌어야 할 내 어금니는 31살인 지금에서야 그렇게 빠졌고, 많이 지친 듯 피도 뿜어내지 않는 어금니를 보며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생니를 뽑는 게 덜 아팠을까 싶은 어릴 적의 기억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들 투성이였다. 되도록 방 안에서만 있어야 했고, 엄마였던 여자의 허락 없이 문을 열고 나가면 화장실이라는 용무 외엔 그 여자에게 혼나기 일쑤였던 날들. 부도로 구치소를 다녀오신 아빠였다곤 하지만, 매 식사 때마다 아빠의 밥그릇은 절반만 차 있어 어린 내가 보기에도 적어보였던 날들.
그 밖에도, 구치소에 있을 때보다 더 죄스러운 표정으로 옥상과 마당의 눈을 치우시던 아빠의 모습, 아동의 나이에겐 강했던 언행 교육, 말소리라도 내면 괴물이라도 찾아올 것 같았던 차갑고 날카로운 공기들이 우리 집이라는 곳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자기합리화에 찌들어 스스로를 갉아 먹고 있을 땐 의문투성이인 내 과거가 나를 더 한심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 같아 어떻게든 샅샅이 확인하고 싶었으나,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꽤 많이도 벅차고 버거웠지만, 바다에 띄운 종이배처럼 과거는 멀어지고 흐려진다.
빠진 어금니를 바라보며 잠시 감상에 빠졌다가, 막내동생이 뉴스를 보며 혼잣말처럼 건네는 나지막한 대화에 금방 끼어들었다(내가 좋아하는 순간이다).
어금니가 있던 자리의 허전함도 금새 익숙해질 것이다. 살아오며 배웠듯, 그럴 것이다.
은이 씌워져있는 어금니는 쓰레기통을 향했고, 난 좋아하는 순간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