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다녔던 사람의 교회 이야기
아버지가 교회를 다니시던 시절.
금요일은 금요 철야 예배, 토요일은 교회에서 봉사 및 예배 준비, 일요일은 아침 예배부터 오후 예배까지 다니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내 기준에서 매우 열심이셨다.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나는 꽤 어린 나이부터 자연스레 교회의 공기를 마셨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많으면 두세 번은 나가는 교회에 불만인 부분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일요일 아침에 재밌는 TV 프로그램들을 볼 수 없단 사실이 마치 교회가 방해하는 것만 같아 종종 투정도 부리곤 했다. 어린 내가 예배 시간을 좋아할 리 없었고, 설교와 성경 공부는 건장한 성인이 될 나에게 국방부 시계의 느낌을 미리 알려주는 듯 했다.
교회 선생님들의 인내심과 헌신 덕분이였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예배 중에 유독 집중을 하게 되는 설교가 있었다. 요한계시록이 그랬다. 신의 자애로움, 전지전능, 인간을 향한 사랑, 축복 등의 이야기가 성경의 주된 내용인 것처럼 느껴질 때쯤 마지막 장에 종말과 끝을 얘기한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도 제법 충격적이었다. 한창 만화를 자주 접하던 때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나올 때면 괜히 귀도 기울이고 질문도 하며 종말과 끝이라는 말이 주는 공포를 새삼 느끼고 깨닫곤 했다.
주변 지인들 중에는 기독교를 종교로 두고 있는 사람이 꽤나 많다. 최근까지도 교회에서의 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교회에 청년들이 없다는 고민들을 입 모아 꺼내곤 한다. 어느 공동체나 그렇겠지만 기독교와 같은 곳에서 청년들의 존재와 활동은 필수불가결이기에, 새로운 청년 신도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과 기존 청년 신도가 떠나는 현상은 공동체적인 면에서 충분한 고민거리로 떠오르는 듯 했다.
교회는 더이상 나가지 않지만 한때 교회를 나가는 것에 재미를 붙였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청년의 나이대에 있는 성인으로서 잠시 생각해봤을 때, 교회에서 청년 신도의 유입이 없는 것에 공감이 될 만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시대에 만든, 혹은 만들어진 기독교의 부정적인 이미지, 타인보다 나를 더 생각하게 되는 적당한 개인주의, 객관적 사실에 움직이게 되는 사회적 문화와 분위기 등등. 청년들의 수 만큼이나 다양한 이유가 있을 테지만, 나는 아주 주관적으로 요한계시록도 그 이유로 손가락 하나를 꼽고 싶다.
일요일 아침에 재밌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싶었던 어린 나에게도, 교회에 재미를 붙여 찬양팀을 하며 열심히 다니던 때도 나에게 요한계시록은 종말과 끝, 혹여나 내가 죄인이라면 받게 될 벌이라는 공포감을 꾸준히 주고 있었다면, 더이상 현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과 성인들, 그리고 나에게 지금 겪고 있는 현실보다 더한 압박감과 공포감은 주지 못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그 이유다.
정확히 어떤 나이대를 얘기하는 것인지는 말하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지만, 내 또래인 이십 대 중후반 ~ 삼십 대 초중반을 최악의 세대, 불운의 세대라고 일컫는 듯 하다. 복지나 혜택에서는 아슬아슬하게 빗나가지만 경제 인구로서 최선을 다해 경제적 활동을 해야하는 그런 세대 말이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은 이제 젊은 사람들에게 다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문장이 되어버렸고, 젊은 세대의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장기적인 것을 바라보기 위해 단기적인 것들에 시선을 돌리곤 한다.
우리는 (조금) 추상적일 수 있는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공포감을 갖기엔 직접 피부에 공포감을 콕콕 찌르는 현실이 너무나도 가까이 있다. 그리고 현실은 우릴 괴롭히기 위해 돈, 건강, 집, 성공, 직장, 결혼 등 다양한 아이템을 집어 좌절감과 실패감을 주기도 한다. 멀리서 찾을 것 없이 가까이서 힘듦을 주겠다고 말하는 듯한 현실을 감당하는 것만으로 꽤나 버겁기도 하다.
앞서 말한 요한계시록이 주는 추상적인 느낌보다 더 추상적일 수 있겠지만, 이러한 현실 속에서 조금은 여유를 찾거나 각자만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린 다시 요한계시록을 읽으며 적당한 압박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