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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뿔 Jan 31. 2022

11월의 연락

언젠가 아픈 몸들이 실컷 떠들어댈 날이 오겠지

21년 11월 첫날이었다.

오월의봄 편집자 님에게서 “급작스러운 연락”이 날아왔다.


평소처럼 메일을 확인하다 적잖이 놀랐다. 출판사에서 연락을? 나한테? 대체 무슨 일로 내 이름이 불린 걸까? 게다가 낯간지러운 ‘선생님’이라는 존칭은 메일을 열어 보기 전까지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떨리는 심장을 붙잡고,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고 클릭.

“XXX 선생님,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오월의봄에서 ….”


메일에는 “급작스러운 연락에 조금 놀라셨을 수도 있겠다”라는 걱정 어린 말이 적혀 있었다. 편집자님의 친절한 걱정과 다르게 많이 놀랐다. 연락한 이유는 책 추천사 인용에 관한 건이었다.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주역인 여섯 배우분들이 쓴 글을 모아서 책으로 출간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완성될 책 제목은 <아픈 몸, 무대에 서다>. 연극을 보고 남긴 내 관람평 일부를 “추천사” 지면에 실어도 될지 물어왔다.

https://brunch.co.kr/@ossicone0309/2

내가 쓴 짤막한 글이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 특별한 문장이 되었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여담이지만, 책이 발간되면 한 권을 보내주겠다는 약속과, 오월의봄에서 펴낸 책 중에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그것도 원 플러스 원으로 주겠다는 말에 이건 기회다 싶어서 냅다 <퀴어돌로지>를 이야기했다. 케이팝 만세.

책은 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한 해가 지나고 받았다. 추천사 지면은 책의 첫 코너였고, 이름 초성이 'ㄱ'인 탓에 첫 문장이 되고 말았다. 아, 부끄러워라...


오월의봄에서 보내준 두 권의 책. <아픈 몸, 무대에 서다>와 <퀴어돌로지>.


<아픈 몸, 무대에 서다>는 질병권 담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연극이 아픈 몸을 날 것의 몸, 다른 몸으로 불러냈다면, <아픈 몸, 무대에 서다>는 무대 위로 드러난 아픈 몸이 무대에 서기까지 겪은 경험과 고민, 망설임을 다시 곱씹으며 그 의미를 아픈 몸 위에 덧씌우는 복기와 언어-만들기의 작업이다. 글이 너무 가지런해서 택한 연극이 “발화하는 몸”을 만들어내고, 그 발화의 경험이 다시 글로 언어화되어 ‘아픈 몸’의 서사는 더욱 넓어지고 풍요로워진다. 몸과 말이 연결되어 비로소 말문이 트인 거다.


‘아픈 몸’이 무대에 선다는 것은 감추고 싶은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부분, 다시 말해 자신의 ‘취약함(vulnerableness)’을 사람들 앞에 내세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픔’을 감추려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그 이유는 결코 개인적일 수만은 없다. 아픈 사람들이 ‘개인적인 사정’이라고 둘러댄 것들의 심층에는 ‘개인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이 왜 감추어야 할 치부가 되어야 하는가. 왜 부당한 낙인과 차별의 까닭이 되어야 하는가. 문제시되어야 할 것은 ‘아픈 몸’이 아니라 아픈 몸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다. 아픈 몸은 개인이 짊어질 몫으로만 남아서는 안된다. 모두의 고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사회’라는 단어는 어딘가 무책임하고 나이브해 보인다. 좁게 말하면 법과 제도로 구성되는 성문화된 규율적 세계를 ‘사회’로 규정할 수 있고, 넓게 말하자면 우리를 둘러싼 공동체 모두를 ‘사회’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픈 몸’은 사회적 존재로서 생활하고자 법과 제도의 테두리 속에서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민과 맞서게 된다. 예컨대 사적인 일로 여겨지는 인간관계의 문제나 통제 불가능한 자신의 몸을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감시하도록 강제하는 자기 관리의 압박은 법과 제도를 넘어서 ‘아픈 몸’을 공동체의 논제로 삼아야 할 이유를 명백히 보여준다. 아파도 괜찮은 세상은 아직 오지 못했다. 팬데믹 3년 차를 맞는 이곳에서 확진자는, 재작년 때만큼은 아니지만,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은 ‘위반자’로 여겨진다. 하지만 언제까지 마냥 가둬진 채로 있을 순 없진 않은가. 밖으로 사람들이 나오지 않아서 힘든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아픈 몸’과 더불어 ‘감염될 몸’도 공동체의 몫이 되어야 한다. 어떤 개인에게 방역 시스템 일부를 책임지라는 방침은 방역의 공공성을 누군가에게 외주화 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책의 도입 필요성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방역이 공동체의 문제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견지하고 ‘함께 짊어지겠다’는 각오를 국가가 여러 대응을 통해 더 보여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을 따름이다.


이제 오미크론 변이는 누구나 한 번씩은 걸리는 흔한 녀석이 되었고, 나와 내 주변을 지키려고 백신을 접종했어도 여전히 무섭다―그렇기에 안티 백서가 더욱 괘씸하다. 만약이지만 이 바이러스에 걸렸을 때, 우리 가족이 겪을 고초가 얼마나 클지, 또 증상이 폐렴까지 이어지지 않아 결과적으로 감염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덜컥 겁이 난다. 근육병―근육병은 종류가 너무나 많고, 그에 따라 증상이나 발현 속도가 천차만별이다. 나는 <아픈 몸, 무대에 서다>의 홍수영 님과 다른 근육병을 갖고 있다―을 가진 나 같은 사람만이 아니라, 면역저하자나 만성질환자 등의 소위 ‘기저질환자’로 분류될 사람들은, 코로나를 잊고 있다가도 뉴스 기사를 접하면 신경이 쓰일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누구나 아플 수 있다고 말해주지만, 치료와 완치의 개념은 바꾸지 못한다. 적어도 감염이 만들어낸 공백을 채우려는 시도가 ‘휴식’의 생활화로 확장되길 바란다. 대학 수강편람에는 대면 전공수업을 열기 위한 준비가 한창인지 ‘대면’과 ‘블렌디드’라는 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공존할 새로운 세계는 코앞까지 다가왔다. 마스크 코받침을 괜스레 꾹꾹 눌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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