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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뿔 Mar 29. 2021

넘지 말아야 할 ‘선’
넘을 수 없는 ‘선’

〈기생충〉은 선(線)의 파노라마


신기한 일이다. 이렇게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영화는 〈기생충〉만한 게 없다. 영화관에서 본 후로 두번째였지만, 저도 모르게 몇몇 대사를 외우고 있었다. 괜히 한 해를 달군 영화가 아니다. 그만큼 강렬하고 치밀하다. 슬프게도 영화를 다시 보게 된 이유는 과제였지만, 아무렴 흥미롭다.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많은 사람들이 지겹게 말한) ‘선’이다. ‘선’은 동익(이선균)이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단어다. 그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선을 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을 넘지 않는다’는 말은 동익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최고의 칭찬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선은 지켜지지 않는다. 윤 기사(박근록)의 행동이 선을 넘고, 기택(송강호)의 냄새와 말(“그래도 사랑하시죠?”)이 선을 넘는다. 때때로 튀어나오는 실체 없는 것들이 끊임없이 선을 넘나들며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둘 사이를 갈라 놓는 저 굵고 얇은 선을 보라.

‘선’은 물리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계로 표현되지만, 여러 장면에서 ‘선’은 만져지는 실체가 된다. 뒷마당 테이블에 엎드려 낮잠을 자던 연교(조여정)를 문광(이정은)이 깨우는 장면에서, 둘로 나눠진 유리창이 두 인물이 머무는 공간에 경계를 만든다. 기택이 운전기사로서 동익을 사장실 앞에서 기다리는 장면에서도 비슷한 연출이 쓰인다.


선이 실체가 될 때 ‘선을 넘는’ 행위를 규정하는 것은 권력 문제가 된다. 선을 넘어서기를 욕망하는 자와 선을 지키려는 자 사이에는 너와 나를 구별짓는 위계가 끈적하게 들러붙기 때문이다.


‘선’으로 양분되는 공간이 가장 극대화되는 장면은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저택에서 반지하집으로 이어지는 ‘계단의 연속’이다. 끝없는 계단을 측면에서 볼 때 만들어지는 빗면은 수많은 선들이 겹치고 쌓인 흔적이다. 선은 아래로 뻗어 나가 마지막 종착지인 반지하집으로 세상의 모든 오수(汚水)를 끌고 온다.


이 선의 집합은 공간을 넘어, 영화 전체를 가로지르는 ‘단절’을 만든다. 영화 〈기생충〉은 선으로 짜인 세상을 보여준다. 단순한 선분이 아니라, 평론가 이동진의 말처럼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1) 입체적인 감각이다. 이때 선을 넘어선 무언가는 통제되거나,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통제와 경계의 방식은 물밑에서 감춰진다.

영화 배경으로 등장한 자하문터널 앞 계단

선을 넘었다고 규정되는 것들이 결말을 향할수록 인물의 행동을 통해 드러남으로써2) 넘어서는 안 될 ‘선’이 분명 있다는 사실을 공고히 한다. ‘선’은 ‘냄새’라는 통제 불가능하고 생리적인 현상, 즉 가장 육체적인 층위에서 비롯되어 더욱 비극적이다. 기택네 식구가 아무리 말끔한 옷으로 차려 입어도 누군가는 옷을 뚫고 나오는 반지하 냄새를 맡는다.


계층의 냄새를 맡는다.


그들이 어떤 계획을 세우더라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고, 넘어설 수 없는 ‘선’이 있다. 그렇기에 모든 계획은 힘을 잃고 허우적대다 끝내 무계획으로 전락한다. 기우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계획이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가 성공한 계획은 없다.

영화 말미에 돈을 벌어 언젠가 저택을 사겠다는 기우의 말은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흩어진다. 그가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이미 명백하게 그어진, 넘어선 안 될 선들이 얽히고설켜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를 만든다. 선을 넘으려는 사람은 기어이 올가미에 걸려 허덕인다.


그들은 선 너머로 갈 수 없다.

선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것들을 소유할 수 없다. 다만 욕망할 따름이다.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주인 없는 잔디밭에 누워 햇빛을 쬐고, 찬장에서 술과 안주거리를 내어놓고 잔뜩 취할 수 있는 잠시 동안의 쾌락이다.


혹은 이와 반대로 지하실에 빌붙어 살면서도 자신을 먹여 살리는 것은 박 사장님뿐이라 하며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리스펙트!”를 외치는 찬미의 방식으로 타인의 일상에 불안정하게 매달린다. 이 두가지 생존 방식은 ‘선 넘기’를 욕망하는 자들을 충돌시키고 어린아이의 생일파티를 핏빛으로 물들인다.


영화 〈기생충〉이 보여준 것은, 끝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고 욕망만이 남겨진 세계에서 느껴지는 참혹한 무력감에서 튀어나오는 ‘찝찝함’이다. 기정의 죽음이 아무리 안타까워도 그를 위한 애도의 자리는 없다. 그 대신 누구도 ‘선’을 넘을 수 없다는 허탈한 생각으로 기우처럼 그저 웃을 따름이다.


세 가족의 파멸을 불러온 욕망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또 누구의 것인가. 쾌락을 좇은 기택네 식구의 이카루스적인 몰락이라 단언할 수 없다. 그 욕망은 엄연히 ‘생존 욕구’에서 피어난다. 기생하지 않으면 무엇도 가질 수 없기에 그들이 겪은 파국은, 욕망에 대한 징벌이 아닌, 이미 예견된 채로 멈출 수 없는 ‘크리슈나의 수레(Juggernaut)’다.

기생만이 유일한 생존 수단인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의 멸망을 빨아먹으며 살아간다. 이 연쇄를 끊어낼 대안을 찾아내려는 고민이야말로 뿔뿔이 흩어져, ‘먹고사니즘’3)에 지친 수많은 기생충을 공동체로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1) 이동진 평론가 〈기생충〉한 줄 평 https://pedia.watcha.com/ko-KR/comments/xzaQAkqBWN2g5

2) 연교가 기택이 차를 모는 동안 창문을 내린 것, 동익이 쓰러진 근세를 보고 코를 틀어막은 것 등

3) 먹고 사는 일이 최우선인 삶의 태도를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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