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더 하자는 거예요. 이렇게 논의했고 실행을 하면서 해야지."
"좀 더 고민해 보자. 나는 좀 더 고민을 깊게 해 줬으면 좋겠어"
"정확히 어딜 어떻게 더 보완하고 싶은 거예요? 제가 고민을 안 했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OO건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건 그냥 결정해 해버리면 간단한 일인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게 더 중요하잖아. 그건 나중에 해"
"이해를 못 하겠네. 빨리 해도 되는 일을 먼저 해버리고 하면 될 걸 왜 일을 쌓아두는 거죠?"
오래전 일입니다.
선배와 일하는 스타일이나 성격이 달라 투닥거리곤 했는데 이날은 감정싸움으로 번져 버렸어요. 주로 제가 불만을 말하는 편이고 선배는 아무 말 않고 참는 편이었죠. 갈등의 주원인 중 하나는 일의 진척도와 실행 부분에서 이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을 빠르게 치고 나가는 편이고 선배는 몇 번씩 다시 보고 고치고 다시 고민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저는 해야 할 일이 10개라면 그냥 해버리면 되는 일, 남에게 넘기는 일은 그걸 먼저 해서 일의 가짓수를 줄인 다음 나머지 시간을 시간 걸리고 중요한 일에 집중해요. 선배는 중요한 일이 있으면 그것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저는 손이 빠르고 추진력이 좋은 편이었고 선배는 속도가 느린 대신 철학이나 관념적인 부분을 파고들어 숙고하는 유형이었죠.
보통은 스피디한 쪽이 아닌 사람을 답답해하고 버럭 하지요. 의견을 내는 데에 거침없고 직설적인 저는 강하게 어필하곤 했어요. 둘이 페어로 일해야 할 때가 많았는데 이날도 같은 문제로 부딪히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CEO가 직접 매주 보고 받던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둘이 이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죠. 저는 중요하고 깊게 고민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시간을 들일 일인가에 의문을 갖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입사하고 오래되지 않았을 때인데 이 프로젝트를 발의하며 오프잡으로 6개월을 계획하는 걸 보고 '이게 무슨.. 아니 이게 대체 왜 6개월이나 걸린다는 거야?'란 생각이었거든요. 이전 직장에서도 비슷한 프로젝트를 했지만 혼자서도 한 달 반을 집중해 완성했었고 다른 일도 병행했었으니까요. 그런 프로젝트들을 많이 해왔기에 오프잡 3명이 투입되고도 6개월 간 하겠다는 일정을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심지어 외부 컨설팅 업체를 투입해 같이 하는 거였거든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6개월이 촉박하다고 했어요.
시작부터 불만과 의구심이 가득했는데 외부 컨설팅 업체의 불성실함이나 이해도 부족에 의한 아웃풋 수정이 반복됐죠. 다음날이면 생각이 바뀌어 수정 지시를 하는 선배가 이 혼란을 더 키운단 불만이 컸어요. 커뮤니케이션 로스로 진도가 나가지 않아 짜증이 극에 달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간단한 일들에 대한 의사결정마저 밀리며 수습하고 있던 제게 사람들의 불만이 쏟아져 결국 폭발해 버렸죠.
"그냥 내가 해버리게 두든가, 결정을 하든가 하세요. 하지도 않을 거 왜 죄다 끌어안고 있는 거예요!"
"뭐가 더 중요한 지 좀 생각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걸 더 고민해야지,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 바빠"
"그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건 그냥 결정만 하면 끝나는 건데 중요도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하면 되는 건 쳐내면 되는데 왜 모든 일을 쌓아두고 밀리게 하는 건가요"
"경솔하게 일하지 말고 좀.."
"뭐라구요? 속도가 빠르다고 진지하지 않거나 덜 고민했다고 말하는 건가요? 당신은 납기 개념이 없어요? 퀄리티를 타협하자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방향 못 잡아 계속 번복하면서, 퀄리티도 정해진 시간 내에 수행해야 실력 아닌가요? 아 진짜 일을 왜 이렇게 해. 저 업체도 일을 저렇게 하는데 그냥 계약 취소하고 우리가 하든가. 얼마짜리 컨설팅인데 저런 식으로 일하고, 우리가 일 다하는데 지금 패널티를 걸어도 모자랄 판에 왜 그러고 있는 거예요"
"왜 이렇게 근시안적으로 봐. 다른 게 뭐가 중요해. 당장 빨리빨리 처리하는 거 팀장님이 좋아하고 인정하겠지만.."
"저기요, OO님이야 말로 사장님한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거 아닌가요? 그래서 다른 건 하나도 안 하잖아요. 본인은 일의 미션이니 가치니 말하며 다른 사람은 그게 없는 것처럼 말하는데 OO님은 인정욕구가 엄청 큰 사람인 걸 왜 본인만 몰라요? 그리고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요. 입 꾹 다물고 있지 말고. 표정을 숨기지도 못할 거면서 왜 말을 안 해. 문제가 있으면 서로 말을 하고 풀게 있음 풀어야 할 거 아니에요. 회피 좀 하지 마세요!"
이 자리에 후배가 앉아 있었는데 자리를 피할 타이밍을 놓쳐 나가지도 못하고 가운데 앉아 어쩔 줄 모르던 표정이 생생합니다. 평소엔 불편한 표정을 하면서도 말없이 참던 선배도 이날만큼은 언성이 높아졌어요. 저와 크게 싸운 날이었죠.
결과는 어땠냐고요?
6개월로 잡았던 일정은 8개월이 지나고서야 끝났습니다. 계속 같은 이유로 부딪혔고요. 컨설팅 업체는 결국 하는 일 없이 큰 금액을 받아갔죠. 저는 '우리 회사에서 이거 했다고 레퍼런스 쓰지 말 것'을 요청했습니다. 정말 심할 정도로 엉망이었으니까요. 다른 회사에 제안할 때 제게 전화해 레퍼런스 써도 되겠냐 연락이 오곤 했어요. 가장 막내 컨설턴트를 시켜서요. 한 게 뭐 있냐, 양심 없는 거 아니냐, 막내에게 이런 전화시키는 거 너무 비겁하지 않냐며 그 상사에게 항의까지 했죠. (성질머리가 저 정도였다니..)
전사 과제로 개발 후 실행은 제 몫이었습니다. 선배가 당연하게 제게 넘겼고 나눠서 하다 보니 역시나 진도가 나가질 않았기에 어느 순간 보면 성질 급한 제가 못 참고 해치우면서요. 아웃풋도 제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못해 그 긴 기간을 할애했음에도 그 프로젝트에 어떤 애정도 가질 수 없는 채로 말이죠. 그 프로젝트의 모든 공은 선배에게 집중되었고 저와 다른 Task 멤버들은 일 년 가까운 기간에 다른 일을 못하며 현업에서 공백만 생긴 셈이 되어 평가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이후로도 선배와 같이 일하는 과정에서 한 번 더 크게 언성을 높인 일이 있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렇게 싸우고 오히려 둘의 미묘했던 신경전은 없어지고 가장 서로를 잘 이해하고 신뢰하는 관계가 되었답니다. 크게 싸운 날 이후 선배가 하루는 제게 말하더군요.
"어릴 때 낙서를 했는데 아버지가 칭찬을 했어. 그다음부터 칭찬받고 싶어서 그림을 열심히 그렸어. 아버지가 좋아하고 어른들이 잘한다는 말을 해주는 게 좋아서. 난 몰랐는데 당신 얘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하니 나는 인정받는 게 중요한 사람 같더라고. 나도 몰랐는데 네 덕에 알게 됐어. 그리고 난 싸우기 싫어서 피하고 그랬는데 너랑 그렇게 싸우면서 감정을 표현하고 처음엔 화가 났는데 후련하기도 했어. 갈등이 있으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맞는 거 같아. 진심으로 고마워. "
네.... 저도 너무 심하게 얘기한 걸 먼저 사과하긴 했어요. 하지만 난 이런 게 정말 싫고 답답해한다라는 말도 잊지 않았죠. ^^;; 그러곤 또 둘이 웃으며 얘기하고 또 싸우고 또 웃고 했습니다. 후배는 그 장면에 대부분 껴있었고요.
나중에 그 후배가 그러더라고요.
"이 인간들 싸이코 아냐?!" 속으로 계속 욕했다고요.
■ 비슷한 에피소드나 갈등을 경험하신 적이 있나요?
■ 여러분은 어떤 상황, 어떤 사람과 주로 갈등하세요?
■ 다양성 존중이라고는 하지만 도저히 참기 어려운 성격이나 업무 방식이 있으신가요?
■ 상기 상황에서 여러분은 누구의 입장이 더 이해되세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은 이런 갈등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다음 편에서는 이때의 제 속마음과 다시 돌아간다면 다르게 했을 것들, 업무상으로는 어떻게 풀었을지를 짚어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