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말하면 벌써 1년도 넘었다. 아내에게 처음 이혼 이야기를 꺼냈던 건 작년 10월 29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비겁한 변명이지만, 솔직히 그때는 정말 이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점을 생각하는 게 우습긴 하지만, 아내가 이혼 도장을 찍은 건 작년 11월 25일이었다. 그날로부터도 정확히 일 년이 지났다.
11월은 긴장이 많이 되는 달이었다. 지난해 11월을 많이 돌이켜보게 될 것 같았고, 마지막으로 아내와 나누었던 대화들, 아내가 마지막으로 차려 주었던 생일상 등등.. 나를 자극할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무사히 생일을 보낼 수 있을지 가장 염려되었다. 지난 2016년부터 생일은 거의 항상 아내와 같이 보냈던 듯하다. 물론 아내가 내 생일을 다 기억하고 있진 못했지만.(웃음) 여행지에서 네이버에 뜬 화면에 '생일 축하드립니다' 라고 쓰여 있길래 아내에게 신기하다고 보여줬더니, 아내가 '아, 오늘 남편 생일이구나!' 했던 기억이 난다. 엄청 서운할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아내와 사이가 나쁘지 않아서 그냥 웃고 넘어 갔었다. 심지어 저 얘길 들었을 때는 저녁도 깊은 시간이었다. 아내는 하루종일 내 생일인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게 참 나와 아내가 맞지 않는 부분이었다.
작년 생일 전날, 군대 동기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처음으로 아내와 이혼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고, 한 동기는 진지하게 자기는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했었다. 처음에 나는 이혼 결심이 굳은 줄 알았었는데, 그 말에 조금 흔들렸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날 내 생일에 아내는 아침 생일상을 차려 주었다. 미역국에 새로 한 밥,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한우 구이. 생일 케이크도 놓여 있었고, 아내가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나서 '지금 노래를 부르기는 좀 쑥스럽지?' 하는 말을 했던 것도 기억난다.(이 글을 적다 보니 갑자기 눈물이 난다.) 평생 군대에 처음 입대해서 먹어 보았던 밥도 있었고, 여러 번 목이 메일 밥을 먹었던 기억이 남아 있겠지만, 이때만큼 밥을 먹으면서 목이 메었던 적은 없었다. 정말 꾸역꾸역 눈물을 참아가며 힘들게 밥을 먹었고, 겨우 눈물을 참고 혼자 여행지로 출발했던 기억이 난다. 가방에는 아내가 싸 준 방울토마토 도시락도 있었다. 그날의 생일상은 나에게 이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 준 큰 전환점이 되었고, 이후에 나는 그날 차라리 같이 울고 아내와 화해하지 않은 것을 죽도록 후회했던 생각이 난다. 친구들에게 질책도 많이 들었고. 그러나 사실 아내는 그날 아마도 이 생일상이 자기가 차려주는 마지막 생일상일 거라고 생각했었다며, 이미 이혼 결심을 굳혀 가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런 후회는 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튼. 지금도 이렇게 기억이 생생한데, 같은 날이 돌아오면 과연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11월을 보내는 것에 대해 정말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11월 마지막날인 지금, 돌이켜 보면 그래도 무사히 11월을 보낸 것 같다.
1년이 지나 같은 날을 맞이한다는 게, 1년 전의 그날을 상기시켜 주는 면은 분명히 있지만,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훼손되고 옅어진다. 또,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서 지금 내가 내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건 분명히 아니지만, 나름대로 이 생활에 익숙해졌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은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너의 외로움은 병이야'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그러나 뭐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지내고 있다. 약도 먹고, 집에 있을 때는 거의 텔레비전이 켜져 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프로그램에 집중하다 보면 내가 외롭다는 걸 느낄 새가 없다. 기억을 돌아보면 아내와 클래식 공연이나 영화를 같이 보러 갔을 때도 그랬다. 아내는 집중이 잘 되지 않는지 가끔 귓속말을 했었는데, 나는 그건 영 편하진 않았던 기억이 난다.
'고모'보다 '고모부'를 더 좋아하고 잘 따르던 처조카를 잊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조카는 할머니, 할아버지보다도 고모부를 더 편애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 친조카를 보면서도 처조카 생각이 많이 나서 힘들었다. 대략 20개월쯤 차이가 나기 때문에, 아직 친조카는 내가 처조카를 보았던 마지막날만큼 자라지 못했다. 친조카의 어린이집 하원을 위해 어린이집에 가면서, 어린이집으로 처조카를 데리러 갔던 기억들이 떠올라 무척 힘들기도 했는데, 친조카를 자꾸 반복해서 볼수록 처조카에 대한 기억은 옅어진다. 이제는 친조카가 '큰아빠는 언제 데리러 와?' 하고 자기 부모에게 묻는다는데, 다시 어린이집에 가서 친조카를 데리고 하원한다면, 처조카 생각이 처음만큼 날까 싶다. 사람은 이렇게 적응하는 동물인가 보다.
어제는 3주만에 병원에 다녀왔다. 상담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의사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에, 원장님이 쉬는 날을 봤다가 그 전날 병원을 가는 쪽으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원장님께 말씀드리니 원장님도 좋아하셨다. 어제도 여전히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상담을 했는데, 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처음보단 확실히 많이 나아졌다는 생각이 스스로 들었다. 아마 원장님도 그렇게 느끼셨을 거다. 여전히 하루에 약을 11정씩 먹고 있지만, 용량은 엄청 낮추었다. 어제도 또 원장님과 용량을 낮추기로 했는데, 신경안정제만 따져 보면 가장 많이 먹었던 날과 비교해 이제 1/5도 먹지 않는다. 물론 그날이 특이했던 경우이긴 하지만. 대체로 평범한 날과 비교해도 이제는 1/3 정도 먹는 수준까지 내려왔다. 한참 힘들 때 먹던 약이 지금 내게 남아 있는데, 아마 이젠 그걸 먹지 못할 것 같다. 먹었을 때 쏟아지는 잠과 심장 박동을 견뎌낼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외로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회사에서 왕따로 지내고 있지만, 모든 직원과 아예 소통이 없는 건 아닌데 최근에 회사 직원들과 같이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길 들었다. 나는 같은 공간 안에서 그렇게 남 얘길 전하고 싶진 않아서, 그런 이야기를 다른 직원들에게는 결코 하지 않지만, 대신 항상 아내가 나의 대나무숲이 되어 주곤 했다. 다른 회사 직원들에게도 아내는 거의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할 정도로. 회사 사람들에게 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돌아와 오후에 일을 하는데, '이제 나는 이런 이야길 할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무척 슬펐다.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친구에게도 그런 상세한 이야기까지는 하기 어렵다. 아내는 매일 내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나마 소통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좋아하기만은 하지 않는 직원과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도 내가 신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내가 무척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것도 편한 사람을. 회사 사람들에게는 내 사정도, 또 회사에서 들은 이야기도 편하게 하기 어렵고, 성당에서 만난 어린아이들은 심지어 내가 결혼한 사실조차도 모른다. 일주일에 내가 정말 속 편하게 내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아내가 있을 때는 아내가 그 역할을 해 주었었다. 그때는 그 고마움을 몰랐지만.
병원에서 상담을 받으며 지난 한 달간 그런 시간이 얼마나 있었는지 돌아보게 됐다.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난 한 달 사이에 아마 한 두세 차례 정도였을 것 같다. 그게 일주일에 두세 차례만 되어도 나는 훨씬 삶의 질이 올라갔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그렇게 직접 도움을 요청하면 많은 사람들이 내 손을 잡아주겠지만, 지금 내 또래들은 한참 아이들이 자랄 때라서 매번 그렇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기가 쉽지가 않다. 모르겠다. 어쩌면 다들 쉽게 도와줄 수도 있는데 그냥 내가 마음에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내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그저 오늘 하루만 버티는 거야', '하루만 버텨' 라는 말씀을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거의 1년이 흘렀다. 어떻게 버티고 버티니 그렇게 되었고, 나는 다시 책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여전히 외로움이라는 병은 가지고 있지만, 그거야 뭐 어쩌겠는가. 내가 감수하고 적응하며 살아가야 할 일이겠지. 결코 가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도 간다. (잊은 건 아니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기억도 옅어지고.
그렇게 하루하루 오늘의 삶에 적응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