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12. 18 임윤찬, 예르비, 도이치 캄머필하모니
임윤찬과 도이치 캄머필하모니
임윤찬과 도이치 캄머필하모니(Deutsche Kammerphilharmonie Bremen)는 서로 다른 배경과 성격을 지닌 음악가와 단체이지만, 고유한 개성과 예술적 깊이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지휘자 파보 예르비(Paavo Järvi)는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접근으로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 정평이 나 있다. 이들이 함께 만들어낼 음악을 기다린 이유다.
'자연' 그 자체와 같은 연주
임윤찬의 연주는 이날 연주는 유독 스스로를 드러내기보다, 음악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번에 연주한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는 안개 낀 호수나 천천히 내리는 눈을 연상케 했다. 1악장에서는 기대했던 강렬한 타건 대신, 볼륨을 줄이고 섬세함을 극대화했고, 음과 음 사이의 타이밍과 밀도로 몰입감을 주었다. 힘보다는 우아한 터치와 분위기로 음악을 전달했고, 오케스트라가 연주하지 않는 피아노 솔로 부분에서는 템포 루바토로 시간을 알뜰하게 활용했다.
2악장은 이날 연주의 하이라이트였다. 가슴 아플 정도로 아름다웠다. 피아노 소리 안에 은은하면서도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고, 오케스트라 음색과의 조화가 돋보였다. 현악기의 트레몰로 위에서 피아노 소리가 애절하게 노래한 후, 간결하지만 감동적인 카덴차를 만날 수 있았다. 후반부에 이어진 바순과의 대화는 따뜻한 위로처럼 다가왔다.
3악장에서도 섬세함과 자유로운 연주가 이어졌다. 내추럴 트럼펫과 오보에에서 약간의 불안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지휘자 파보 예르비의 효율적인 컨트롤은 임윤찬의 연주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임윤찬의 투명한 오른손 터치와 이따금 존재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왼손 움직임도 인상적이었다.
앙코르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를 연주했다. 수많은 버전을 들어왔지만, 이번 연주는 기존과 완전히 다른 독창성이 느껴졌다. 특히, 원음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아포자투라(원음 앞에 오는 장식음)가 인상적이었다. 매 순간 예외적인 움직임이 이어졌지만, 전체 음악은 자연스럽고 조화로웠다. 임윤찬이 연주하는 바흐를 더 듣고 싶어졌다. 라이브뿐만 아니라 음반으로도 그의 해석을 꼼꼼히 감상하고 싶다.
파격을 고전으로
20년의 동행. 도이치 캄머필하모니와 파보 예르비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이다. 서로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파트너를 만나 함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이들의 연주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브람스 등 주요 레퍼토리에서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시대악기의 연주 성과를 현대 악기로 구현하는 절충주의의 대표 주자들로, 단순히 연주를 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클래식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지휘자와 단체로 자리 잡았다. 항상 파격적으로 보였던 파보 예르비와 도이치 캄머필하모니의 연주 스타일은 이제 새로운 고전이 되었다.
돈 조반니 서곡, 주피터 교향곡, 시벨리우스의 짧은 두 곡까지, 이들이 만들어내는 표현력과 합주는 감탄을 자아냈다. 특히 현악기 파트의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빠른 악장에서는 활력과 생동감이 넘쳤고, 느린 악장에서는 섬세하고 정교했다. 비브라토와 활의 작은 사용법까지 일치하는 모습에서 오랜 시간 함께 맞춰온 호흡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편안하게 즐기면서도 압도적인 음악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멋졌고, 음악가로서도 부러웠다. 관악 파트에는 객원 단원이 유독 많았던 것 같다. 각자가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어우러지는 면에서는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에도 쇼팽 협주곡에서의 바순 연주와 시벨리우스 슬픈 왈츠에서의 클라리넷 연주는 특히 돋보였다.
파보 예르비의 연주는 한 번도 지루했던 적이 없다. 그의 시원한 몸동작과 독창적인 해석 덕분에 하루 종일 음악을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이런 매력은 모차르트의 서곡과 교향곡은 물론 앙코르로 연주된 시벨리우스 곡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또다시 한국에서 그를 만날 날을 기대해 본다.
안개 낀 호수와 같은 쇼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