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11. 05 루간스키 피아노 리사이틀
라흐마니노프의 연습곡(Op. 33, 39)
루간스키의 피아노는 타건의 농도가 짙다. 오른손이건 왼손이건 주선율은 높은 도수의 싱글몰트 위스키처럼 진하고 강렬했다. 부선율은 주선율과 분리해 다른 층에 위치시켰고, 덕분에 다층적 음악 구조에서 필요한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음들이 무수히 쏟아져도 교통정리가 확실했다.
루간스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교와 컨트롤을 갖춘 피아니스트다. 라흐마니노프의 회화적 연습곡에서 그는 딱 필요한 만큼만 능력을 발휘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특히 빨간 망토 소녀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알려진 Op. 39의 6번이 인상적이었다. 늑대의 울음소리와 겁에 질린 소녀의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루간스키의 폭넓은 악상, 음색의 다양성, 섬세한 음가 조절까지 만끽할 수 있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Op. 23)
연습곡에서 섬세한 테크닉을 맛봤다면, 전주곡에서는 해석과 감정선이 돋보였다. 첫 곡인 라르고부터 밀도 높은 연주로 공간을 가득 채웠다. 대개 단조로 이루어진 전주곡들은 슬프고 아름답게 울렸다. 루간스키의 라흐마니노프 연주에서는 빈틈이 느껴지지 않았다. 음과 음 사이가 빵빵하게 채워져 있는 느낌이 참 좋았다.
4번 전주곡 안단테 칸타빌레가 압권이었다. 유일한 장조 곡인만큼 가장 힘을 빼고 친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 담담함이 최고의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가운데 주선율이 진하게 노래하고, 위아래 성부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마치 잘 짜인 3중창 같았다. 모든 성부가 서로를 세심하게 배려하면서도 분명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연주한 행진곡은 2부의 바그너를 기대하게 했다. 빨라도 복잡해도 여전히 선명하고 뚜렷했다. 마치 피아노 건반이 부르는 대규모 합창 같았다.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
대부분의 관악기, 현악기, 성악은 바그너 작품의 일부가 될 수 있지만, 피아노는 그렇지 않다. 어쩌면 바그너의 음악극에서 가장 먼 악기가 피아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아노는 단 한 사람이 바그너의 거대한 음악을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악기이기도 하다.
도전은 가능하지만, '신들의 황혼'을 피아노 한 대로 구현한다는 음악적 기대는 크지 않았다. 방대한 관현악의 음향을 피아노로 완벽히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유도동기들은 선명하게 들렸다. 나직하게 말해도, 강하게 소리쳐도 귀에 날아와 꽂혔다. 다만 수십 명의 현악기가 만들어내는 다이내믹과 분위기를 왼손 트레몰로만으로 채우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루간스키는 진심이었다. 그 마음에서 감동이 왔다.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불러 모아 거대한 작품에 다가가고 있었다. 루간스키는 자신을 뽐내기보다는 겸손하게 스토리텔링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바그너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향하고 있었다.
프롤로그에서 브륀힐데와 지크프리트의 사랑을 노래한 후, 지크프리트가 라인강을 여행하는 장면이 찬란하게 그려졌다. 장송행진곡에서의 피아노 저음 소리는 풍부한 배음을 품고 있어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브륀힐데의 희생 장면에 다다랐을 때쯤, 귀가 피아노 소리에 적응된 것인지 루간스키의 연주가 나를 설득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야기가 온전하게 그려졌다. 라흐마니노프보다 덜 완전했지만 더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사랑의 죽음'
엄청난 기량을 갖춘 자의 겸손한 도전은 그 자체로 멋졌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3막 '사랑의 죽음'에서는 또 다른 바그네리안, 리스트가 더해진다. 바그너와 리스트는 힘을 모아 피아니스트에게 거의 모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내면의 감정 표현, 복잡한 화성, 넓은 폭의 악상, 최고 난이도의 기교까지. 루간스키는 차분하고 묵묵하게 소리를 쌓아 올렸다. 모든 능력을 발휘했지만, 정작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은 거의 없었다. 오롯이 작품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다. 쏟아지는 박수를 이기지 못하고 세 곡이나 앙코르를 선사해 주었다. 루간스키의 라흐마니노프는 하루 종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연주를 한다는 것은 감성과 이성의 밸런스를 요구하는 일이다. 뜨거운 마음으로 노래해야 하지만 차가운 마음으로 컨트롤해야 좋은 연주가 나온다. 나는 대체로 50대 50에서 조금은 더 감성 비율이 높은 연주자에 마음이 가는 편이다. 반면 루간스키는 이성 쪽에 조금은 더 비중을 두는 연주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좋았다. 이유는 뭘까? 작품이 온전히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연주자는 결국 작품을 전달하는 존재다. 연주자는 조금 덜 뜨겁게 느껴졌지만, 작품이 가진 감정과 매력이 뜨겁게 전해졌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피아니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