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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Sep 12. 2023

꼬장꼬장 근사한 대기업

물경력자와 함께한 이직 한 달, 회고

웹 에이전시 기획자로 시작해 대기업의 인하우스 서비스 기획팀을 거쳐 이커머스 플랫폼 스타트업 PO, PM까지. 다양한 커리어 패스를 거치며 결국 그렇게 욕을 입에 달고 살았던 ‘대기업’의 생태계로 다시 기어들어왔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적자를 면치못하는 스타트업에서의 매출압박으로 인한 겉치레 기획이 견디기 어려웠고, 두 번째는 강력하게 설득하지 못한 원인이 ‘비즈니스 감각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에 사업을 배우며 성장할 곳이 필요했다.


그렇게 운이 좋게 대기업 내 신사업 부서로 이직을 했고 첫 일주일 소감은 ‘나쁘지 않네’였다. 워낙 개성이 강한 친구들 사이에서 안 맞는 조각처럼 겨우 적응하다가 지긋이 나이 드신 어르신들 사이 중간 관리자 역할은 마치 이제 막 시집간 새댁이 친정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어쩌면, 필드에서 뛰고 싶다는 것은 욕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주니어들이 사고도 치고 칭찬도 받으며 생기 넘치게 일하며 성장해야 하는 필드에서 사고 치는 것을 예방해 주고 과도하게 취할까 우려되어 칭찬에는 조금 인색한, 마치 생생하고 파릇한 새싹 위에 두터운 흙을 덮어 성장을 막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으르신들이 많은 곳에 나는 다시 합류하게 됐고 주니어들을 잘 성장시키고 팀의 일하는 방식을 수립하는 파트장의 미션을 받게 됐다. 그리고 입사 3주 차, 기능 딜리버리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거시적인 제품 방향성을 설계하는 편이 더 맞는 것 같다는 확신도 들었다. 이직 후 스타트가 좋다.



물경력의 발견

그런데 역시 모든 것이 좋을 리 없지! 소위 ‘물경력’으로 불리는 동료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의 이상한 행동들이 내가 아직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진가를 몰라보는 것일 거라 믿었다(아니, 믿고 싶었다).


내가 속한 조직은 ‘신사업팀’으로 원팀 구성으로 된 조직이고 내부에는 나와 함께 일을 할 PO가 존재한다. 사실 대기업이 웬 PO?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대기업은 원래 트렌디한 것을 좋아한다. 좋아 보이면 마구잡이로 적용하고 본다.


그렇게 기획자 롤로 있던 친구가 PO가 되었는데, 쉽지 않은 캐릭터다. 물론, 아무래도 기존에 일하던 사고를 바꿔 일을 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것은 인정. 그러나 바꾸려는 노력도 왜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


우리 팀은 하나의 신규 버티컬 커머스를 출시해야 한다. 보통 이런 신규 서비스의 경우 출시 전 PMF(Product market fit)를 찾는데 온 힘을 쏟게 마련인데, 여기는 출시 방향성이 너무 명확하다. ‘본부장님 말씀’


어찌 보면 뭐, 그게 맞을 수도 있다. 본부장님은 여러 스타트업 창업 경험과 동시에 국내 굴지의 IT기업 초창기 멤버 등 경험이 풍부하신 분이니 그의 인사이트가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프로덕트를 담당하는 사람이면 ‘왜’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고 방향을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신박한 업무 체계

작성된 기획안을 봤을 땐 가히 충격 그 잡채.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파워포인트로 작성된 스토리보드였다. 한 9px정도로 보이는 빼곡한 텍스트, 버튼을 눌렀을 때 어디로 랜딩 되어야 할지, 어떤 데이터들이 움직이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도식화된 프로세스를 기대하기는 어렵고, JIRA와 Confluence를 사용함에도 활용이 전혀 안되고 있었다.


일하는 방식 기본 룰은 스프린트라고 하더니 스프린트 내 작업해야 할 티켓은 보이지 않았고, 티켓을 발행하는 즉시 현재 진행하는 스프린트를 모두 넣어놨다. 와우! 타이틀 수정이라는 Task를 스프린트 6개에 거쳐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신박하다.


체계부터 잡아야겠단 생각에 TPM와 상의하고 개발팀과 논의를 잡았는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프로덕트에 대해 논의를 했던 적이 없다는 것. 우리 팀에 PO가 있음에도 신사업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볼 때는 ‘건들지 마 우리 팀'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물경력 PO는 제품 방향성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물어보는 질문마다 ‘본부장님이 이거 하라고 했어요.’라든가 ‘본부장님이 이런 거 싫어해요.’라는 답변을 계속해서 건네왔다. 문제는 나와 얼라인되어야 하는 팀장도 같은 말을, 유사한 타팀 팀장들도 앵무새처럼 그 말을 반복한다. 아, 어쩌지?


그놈의 본부장을 만나보자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본부장에게 1 on 1을 신청했다. 분명 인터뷰에서 느낀 본부장님 느낌은 나와 유사한 결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혹시나 그가 만들어둔 동물원은 아닐까 싶어 얘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난관이 생겼다. 팀장이 우려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묻는다. 왜 그 높으신 분을 만나려는 것이냐며. 아! 맞다! 여기 대기업이지!!


신청을 먼저 해서는 안 됐다. 팀장과 충분한 논의를

하고 득허한 뒤, 팀장이 본부장에게 이런저런 사유로 논의드리고 싶다고 얘기를 했어야 했다. 이런! 내가 너무 직급 없이 일하는 회사를 오래 다녔나 보다.


정중히 사과의 말씀을 전한 뒤, 프로덕트의 방향성을 잡는 도중 본부장님의 역사와 생각하고 계신 방향성의 결을 맞추고 싶어서 만나 뵙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니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아마도 내가 나가겠다고 얘기하거나 팀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할까 봐 걱정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겨우 드디어 본부장님을 만났다. 적응은 잘 되어가는지, 회사는 좀 어떤지 캐주얼한 대화들이 오간 뒤 본격 질문을 시작했다. 본부장님도 여러 스타트업을 겪어서 그런가 1 on 1이 익숙하신 듯 보였고 이런저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말씀드리니 조용히 듣고 한 마디가 돌아왔다.


그래서 달하님을 모셔온 거예요.


드디어 맡길 사람을 찾아서 너무 기뻤고 빨리 오기를 너무나 기다렸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한 시간 반의 대화를 통해 확실해졌다. 이 모든 상황은 절대 본부장님이 내려찍어 그러라고 해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물 흐르는 대로 고민 없이,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찍어내는 ‘물경력자‘들의 위계질서였던 것뿐.


이전 회사에서는 내가 따라갈 리더를 찾는데 일 년 반의 허송세월을 보냈다. 찾은 것 같다가도 아닌 것 같았던 반신반의 상태로 세월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다른 것 같다. 아직 확신하기는 이르지만 한 시간 반이라는 짧은 시간의 대화만으로도 그를 따르고 싶어졌다. 그것이 본부장님의 훌륭한 리더십 역량이 아닐까.


결론: 이 회사, 잘 왔다!

대기업은 역시 꼬장꼬장하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전혀 싫지가 않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긴 시간 다양한 변종(?)들을 만나면서 내공이 쌓인 탓일까, 오히려 꼬장함은 편안함으로 다가왔고, 갑갑한 물경력자들을 보며 저들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마저 쉴 여유가 생겼다.


그 와중에 멋진 리더십과 인사이트를 지닌 리더까지 가장 상위에 있다. 그를 위해서, 더불어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거라는 생각에 일하는 재미가 다시 생겼다. 흐릿하고 주관 없이 살아있는 시체처럼 일하는 물경력자들에게 물들어가지 말지어다.


중요한 싸움을 시작한다. 참으로 근사한 넥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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